삐아제의 세 개의 reflective abstraction들을 번역함에 있어,
‘reflective’를 반사, 반영적 또는 반성적 둘 가운데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상당수 번역본들은 ‘반영적’을 택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번역자들이, 그리고, 인식론적 경향성이,
유물론적, 즉, 반영론적 경향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 텍스트에서,
특히, 이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 개의 reflective abstractions 가운데 핵심은,
소급적 주제화, 즉 반성된 추상, 또는 반성적 생각임을 볼 때,
반성적 추상들로 번역하는 것이 영어 맥락의 흐름에서와 잘 들어맞는다고 보인다.
왜냐? 세 개의 반성적 추상들 가운데,
첫째 반성적 추상에 다른 이름을 굳이 붙인다면, ‘반영적 추상’이 적절할 수 있지만,
이절 삐아제의 두 구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영된 것들에 대한 대체로 의식적인 재구성, 재조직을 수반하는 것임을 볼 때, 그리고
이 텍스트 필자 언급대로, 사영 또는 반영이 일정 특징에 한정되는 것이기에,
세 개의 reflective abstractions의 대표하는 번역어로,
반성적 추상이 적절하게 보인다.
덧붙여, 다음 절에서,
필자가 설명한 다음 구절을 보건데,
의심의 여지없이, 적어도 이 텍스트에서는 확정적이다.
<“ 특정 주제, 반성적 추상을 다룬 둘째 권 말미, 삐아제 요약에 속한 이 진술(陳述)에 이르러 분명해지는 것은, 그가 통상 세 가지 유형을 논한 순서로 인해 약간 길을 잘못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은 발달에 따른 순서도, 논리에 따른 순서도 아니다. 그가 ‘반성적 생각’이라 적절히 칭하며 3가지 유형 가운데 두 번째로 열거한 것은, 유형 1이나 유형 3인 반성적 추상들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인지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또한 ‘실험-관찰적’ 추상의 더 진전된 발달로서 적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