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식은, 약 20년 후에야 내가 발견했던 것과 같은, 그 유명한 사피어-워프 가설의 핵심이었다. 아주 간략히 적자면, 이 가설은 사람들이 그들 세상에 대해 보고 말하는 방식은 대개 그들 모국어에 따라 결정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Whorf, 1956). 돌이켜 생각컨데, 인식론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내 직접 경험이었다. 언어가 내 경험 구조와 관계를 갖고, 그렇기에, 그것이 내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갖는다고 하면, 이어, 내 언어들 뒤에 실재하는 실재[real reality: 경험 너머 실재 그리고 존재론적 또는 존재적 실재]란 어떤 것일 거며 어떻게 그것을 알고 기술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에서,
"내 언어들 뒤에 실재하는 실재"로 번역된 구절은,
"real reality behind my languages"다;
여기서, 'real'은 '정말 있다는'는 의미다.
해석의 모호성이 있다.
실재론자한테 그리고
아직 구성론의 문턱을 넘지 않은 당시 사고 주체한테,
실재하는 실재는 '경험 너머 실재'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필자한테,
'real'이 강조된 "real reality"는
자신의 언어들 모두를 떠받치고 있는
"real experiential realities"일 것이기에,
이것일 가능성은 없고,
그러한 실재하는 현실들에 대한 기초로 기능하는, 즉,
우리가 경험한 실재의 제약들로서
우리 경험의 여하한 구성적 실재도 허용하는
본원적(ontic) reality로 해석될 수 있다;
비판적 실재론자는, 이 대목에서도,
'ontic' 대신 'ontological'을 택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본문에서,
'세계'가 아닌 '세상'으로 번역된 맥락에
주의하면,
필자한테면,
영어 문장을 쓸 때 다의성이 없었으리라 여기지만,
독자한테는 다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느슨함을 제공한다.
먼저,
'뒤에'로 번역한 'behind'를 모호성 없이 '떠받치는'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앞서 'world'를 '세상'으로 일의적으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 느슨함은 역시 'reality'의 다의성에서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