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RC는 유아론이 아님을 입증하겠다는 언급에 맞게,
RC는 경험으로 마주하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고, 우리가
그 세상을 마주하고 우리 경험적 실재를 다루는 것에 대한,
여러 생각하기와 행하기 방식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2장).
그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마음을 포기한 극단적 경험론 분파로서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비판,
그리고 빈번하다 못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실재론, 말인즉, 불확실한 감지 경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지만,
이보다는 우월한 이성의 권능으로 실재를 반영할 수 있다는 합리론에 대해 비판들이 이어진다.
5 장에서,
삐아제가 2500년 동안 사람들을 괴롭힌
'주-객의 문제'에 맞서 해결을 어찌 보았는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5장 철학적 붙임말에서,
경험론과 합리론 균열과 양극화가 구성론적 관점에서 보아,
어디서 어긋나 그리 되었는가를 찾아 밝히고 있다.
지식의 원천을 놓고,
그리고 감각 경험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에 대한 생각에 대해
벌어지는 논쟁들이 어긋난 지점은,
목표에서,
살기의 바이어빌러티가 아닌
정적 존재에 대한 진리성을 두었다는 점과,
방법에서,
그들 모두가 순환적 인과성, 즉,
자기-준거(指示) 논리를 거부한 것에서 시작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로 보아, 구성론은,
경험론인가 합리론인가,
관념론인가 유물론인가,
인식론인가 존재론인가, 또는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 하는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어디에 더 가까운가 또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평가를 할지라도, 그 전에,
구성론이 무엇이 아닌가부터,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언급한 것들부터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가장 먼저, 구성론, 특히, RC는,
먼저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경험 너머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여하한 설명, 언급도 불가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럼에도,
RC는 유아론이 아니다.
경험 너머 있을 수 있는,
우리가 세상이라 부르는 바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성으로,
그 세상의 형식, 구조 비슷한 것을
가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논증한다. 또한,
우리 감지 경험을 거친 데이터가,
그 세상의 그 어떤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논증한다: 이는,
자기-지시적, 순환적 인과성에 기초한 이차 사이버네틱스와
여러 RC 버전들이 공통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바다.
셋째, 인간 경험이,
제공하는 소재 또는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소재, 물질들이 구성, 가공되어 생산되는
생산물들의 실용성과 그 확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 구성된 만들어진 생산되었던 것들이 이어지는 시점에서,
구성, 제작, 생산, 변화 활동의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넷째, RC의 주창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의 이론을 인식론으로 규정하기를 꺼린다.
이 텍스트의 필자 또한 자신의 이론을 ‘알기 이론’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가 함의하는 것은,
존재론을 암묵적으로 끌고 들어오는 인식론이란 용어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고로, 구성론은 자체로 실재하는 바에 대한 이론이라는 존재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모든 것,
사회라 우리가 부르는 것을 포함해,
것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우리의 구성물들이며, 그것들은,
언제든 우리 경험의 여건들과 우리 협력, 그리고
또 다른 그 어떤 바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매우 유동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다섯째,
주-객의 분리, 몸과 마음의 분리,
인지와 행위의 분리, 행위와 책임의 분리와 같은
이원적 경계들이 구성론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구성론은, 전적으로,
개체로서 주체한테 구성된 모든 것들을, 그것들로부터 소외가 아닌,
그것들에 대한 적극적 분석과 이해하기를 통한 자기화를 가능케 하며,
몸을 마음과 함께 병발적으로 구성된 마음의 일부이자 도구로서 여기며,
그를 통한 행위 그 자체에 귀속된 책임의 일상화를 당연시 한다:
행위와 책임을 분리하는 것, 이로써,
나중에 이리저리 책임지겠다는 말은 명백한 사기 행위며,
이를 방관, 묵과하는 것 또한 사기 방조죄에 해당된다.
고로, RC는,
일관된 모순 없는 구성론이자,
자신을 그저 도구의 하나로서만 여기는 전적인 도구주의며,
형이상학을 거론하는 그 어떤 철학적 인식론이나 존재론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정신을 공유하는 유파와 사조, 그리고 인물들이 있었음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