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참나'라는 '신비'의 미끼 상품으로 판매하려는 것은 '진리'다.

환상, 신기루, 고향, 거울 이미지, 무지개와 같은 

상호주관적일 수 없는, 즉, 

존재의 속성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으며, 

극한의 '나' 또한 그것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지시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는 

'것'으로 칭해질 수 있다.

 

‘자아’에 대해 말하며 무언가를 하거나 경험하고 있다는 것은, 

그 극한의 '나'가 어떤 습 또는 스킴, 또는 시스템에 실려서[착(着)해서], 이른바,

에이전트로서 무언가를 하거나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전적으로 합리적 과정이다.

 

하지만,

자아라 부를 수 있는 전제, 근거를 제거한 상태로서,

그것, 즉, 철학적 '나'나 극한의 '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진아(眞我)' 혹은 '넋(魂)’를 언급하는 것은, 

이미 합리적 영역을 너머 신비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신비한 아(我)는 분명 자신이 실린 것에서, 즉, 착했던 과정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잠시 그것과 자신의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리고 멈칫거리며 머물 곳을 찾아, 은유로, 두리번 거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디든, 우리가 존재라 칭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까지, 

실렸다, 벗어났다는 반복할 수 있다; 그것의 권능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실린 것이 합리적이며 바이어블한 것이 아닌 것일 경우,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합리적 또는 진리라는 외피를 쓰고 착을 유혹하는 경우,

능동적이며 선택의 자유를 지닌 그리고 인지 주체로서 설정된 또는 그 역할을 하던 아(我)가, 

그런 방식으로 끌려 들어간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그 것, 그 곳은, 대체로, 

<아무 것도 없는 무, 공, 따위의 또는 그 어떤 신비한 영역>이 아닌, 

그 방식을 시도한 자가 전개한 펼쳐 놓은 미로, 또는 분석틀이 펼쳐지는 <진입로 앞>일 것이다: 

신비는, 

전적으로 홀로 경험하는 개체적이며 전적으로 사적인, 즉 주관적 사건이자, 

결단코 합리적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 아(我)가 하고 있던 또는 경험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거리두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찰나(刹那)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그 찰나를 길게 유지시키려는 시도는, 

잠깐의 열반을 맛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곧바로 연속된 또 다른 알아차림들로 이어지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연속이 아닌 

이산적인 개체적 사건이다. 

찰나의 영원으로 이어짐이라는 기만적 생각 또한

앞서 말한, 객관, 진리, 보편, 무한, 죽음과 같은 

관념들이 생겨나는 조작과 동일한 조작으로 생성된 것이다. 

 

말인즉, 

그러한 기만적 생각이란,

그 자체로 신비적 영역에 속하는 상상들이, 

일정한 그럴듯한 합리적 치장을 거쳐,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합리적 사고 안으로, 

의미심장한 정보의 함축을 가장하고 유입된 것에 다름 아니다;

경험 너머 실재의 정보가 노이즈 가운데 

유입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