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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에 대한 비판적 실재론과 구성론의 차이

이러한 문제를 무시하고, 콘라드 로렌츠 작업을 시작으로 발전된 진화론적 인식론 운동은, 특히, 도날드 켐벨이 그 인식론에 부여한 확장된 형식에서 상당한 기세를 얻었다; 그는 그것을 ‘가설적 비판적 실재론’으로 특징 지웠다. 켐벨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개념들은, 칸트 생각처럼, 인간 이성의 선험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체가 우주에 적응한 결과다>라는 점에서 로렌츠와 의견을 같이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은 ‘실재에 대해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진 견해(視角)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변이들이 몸의 형식 혹은 시지각물 혹은 과학적 이론까지 통제하고 있다 해도, Ding an sich(물-그-자체)는 항상 간접적으로만, 언제나 알기 주체의 설정(假定) 언어로만 알려진다. 이러한 의미로,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反映),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에서 선택되어진 것>에는, 간접적이나마 일종의 객관성이 있다. (Campbell,1974, p.447) 

 

그와 같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일종의 ‘반성’[또는, 그러한 실재의 ‘반영’]을 전제(當然視)함에 있어 결점은, <특정 시점에 바이어블한 (즉, 적응된) 것으로 입증된, [진화된 물리, 행동, 개념, 등등 구조]는 가능한 최상의 적응을 향한 필연적 도정(道程)에 있다>고 믿을 여하한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생존한 것들을 보존한 자연 선택은 우연한 변화들로 실제 야기된 변이들 중에서만 골라냈을 것이다. 이때 켐벨이 말한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은, 개념적 수준에서, 그 당시엔 불가결하게 보였던 기본 원리와 양립 불가능했기에 단연코 시도되지 않았던 훨씬 더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을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유기체 적응 결과로 자연 자체의 어렴풋한 구조가 알려진다>는 생각은 생물학자들의 발견, <수백만 년을 진화 생존했음에도 그 종들 대다수가 특정 시점에 멸종되었다>와는 전혀 맞아들지 않는다. 

그런데, 더 근본적 논리적 결함이 진화론적 인식론의 전제들에 있다. 로렌츠 쓰기를, ‘주어진 환경 조건에 적응은 그 조건에 관한 정보 획득과 동등한 것이다’(1979, p.167). 이게 그의 학파의 주된 단정(斷定)이지만, 정당화될 수 없다. 적합(fitness) 또는 바이어빌러티와 같은 생물학 개념은, 유기체나 종들이 각기 ‘부여된’ 환경에 관한 정보을 갖추는 거나 그 환경과 속성들을 공유하는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응에 요구되는 건, 유기체들이 긁히거나 충돌하는 지점들을 피하는 것뿐이다. 자연 선택의 체(sieve)를 통과한 여하한 것도 자신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이에는 그 체의 구조와 관련된 여하한 지시도 없다. 진화론과 구성론 모두에서, ‘맞아들다(適)’는, 거기 있었을 여하한 제약들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에서,

 

'진화'에 대한, 

비판적 실재론과 구성론의 차이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첨언하면,

 

콘라드 로렌츠는, 1973, 그의 책, ‘거울 뒤에서: 인간 지식의 자연사에 대한 탐구’에서, 

<우리 감지들이 우리한테 세상 자체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전하는지, 

아니면 그저 환상만을 보여주는 건지> 여부에 대한 

오래된 철학적 문제를 숙고하고 있다. 그의 답은 진화론적 생물학에서 나온다:

“오직 우리가 살아남아 재생산하는 걸 도왔던 특성들만 전해질 뿐이다. 

만약 우리 감지들이 우리 환경에 관한 틀린 정보를 우리한테 주고 있다면, 

우리는 곧바로 멸종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 감지들이 우리한테 정확한 정보를 주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기만당하기 위해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