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문은 어떻게 결판날 것인가? 단연코, 경험으로다; 자연 자체에 대한 여타 모든 의문들처럼. 하지만, 여기서 경험은 침묵이며, 전적으로 함묵(含黙)일 수밖에 없다. 마음은 지각들 말고는 자신한테 여하한 사물도 제시할 수 없기에, 그 지각들을 대상들과 연결하는 여하한 경험도 결단코 불가능하다. 고로, 그와 같은 연결을 가정하는 건 아무 근거 없는 추리다. (ibid., Essay xii, Part I)"
에서,
자연 자체(a like nature)의 해석은
‘유사 자연’이라고 직역하면 모호성이 있기에,
여기서 이 단어들이 지시하는 바가 경험 너머 실재, 세계와 다르지 않기에,
‘자연 자체’로 번역하는 것이 맥락에 잘 들어맞기에 그리했다.
자연 자체에 대해서 경험은
그 어떤 바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없기에 할 말이 없고, 그리고,
설사, 갈등과 실패, 섬찟, 섬뜩, 등등 그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있음의 짐작을 가늠한다 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독해된다.
이러한 흄의 입장을 구성론적 시각에서 이해, 설명하자면,
(여기서, '외부'는 어떤 과정의 외부지, 경험 너머 실재가 아님을 주의하라)
우리가 ‘지각한다’할 때, 그 순간에
우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하나는 지각장에서 특정 감각을 구별해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구별된 감각을 동화, 조정시킬 지각 패턴을 펼쳐내는 일이다.
이때, 동화 또는 조정이 성공적일 경우, 즉, 지각에 성공했을 경우,
우리는 알아본다, 알아듣다, 알아먹다, 등등으로 표현한다.
한편, 우리가 지각장에서 구별해낸,
구별 조작을 마치고 주의가 대상으로 여기는 것, 또는 감각이
그 순간 그 어떤 패턴에도 동화, 조정될 수 없는 것일 때,
우리는 그것 자체를 알아차린 지각, 새로운 것으로 구성된 어떤 것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 때, 신기하다, 기이하다, 새롭다, 흥미롭다, 등등의 표현으로 응대한다.
여하튼, 우리가 지각할 때,
지각 대상이라 칭하는 것은,
전자, 재인(再認)의 경우는,
그 지각 과정에서 감각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 감각된 것을 지각 패턴, 즉 이전에 구성했던 대상의 속성으로, 즉,
대상에 대한 지각으로 처리하며,
후자의 경우는
구별된, 구성된 감각, 알아차린 지각으로 그 자체가 주의의 대상이 된다.
고로, 지각과 그 지각의 대상은,
지각자의 지각과 지각자의 경험 너머 대상과 연결이 아닌,
감지된 지각 요소와 이것을 동화, 조정하는 지각패턴이라는 대상과 연결이다.
이러한 지각 경험에서,
그 경험이 마주하는 세상이
그 지각 주체한테 드러나는 상황은 두 가지다.
이전 지각 패턴이 작동하지 않을 때와
전혀 새로운 감각을 구성할 때다.
전자는 세상의 제약들과 접하는 것일 수 있으며,
후자는 그 제약들 사이 허용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그저, 세상에 맞서는 우리 지각, 구성, 행하기 경험을 거쳐,
이에 기반해서, 우리가 그리 여기는 것일 뿐인 것이지,
이에는,
그 세상의 구조나 얼개를 가늠할 그 어떤 것도 함의되어 있지 않다.
요컨대,
경험 저쪽의 것이 아닌 경험 이쪽의 것으로는,
경험 저쪽의 것을 말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은,
경험으로 마주하는 세상과 경계면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것일 뿐이며,
전자는 합리적 언어로 후자는 시적 은유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경험은 자연 그 자체에 대해, 전적으로 침묵, 함묵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