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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개념의 근저에 있는 의식(알아차림): 극한으로서, '세계'의 것이 아닌 철학적 나

내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한테는 의식이나 알아차림 모델에 대한 단초(端初)조차 없다는 바와 관련해서, ‘것’으로서 자아 개념의 그 근저에 알아차림이 있다는 주장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럼에도, 바이어블한 알기 이론을 구성하려는 여하한 시도에서도 알아차림의 근본적 신비는 인정될 수밖에 없다. 비트겐쉬타인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것은, 철학에서 ‘세계는 나의 세계다’는 사실을 거쳐 나온다 … 그 철학적 나는 사람이 아니며, 인간 몸도,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 정신(魂)도 아닌, 형이상학적 주체, 극한이다 –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Wittgenstein, 1933, par.5.641)

에서,

 

철학적 '나'는 

<신비한 ‘것(entity)’>이다.

 

이것이 신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폰 글라저스펠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아래는 은유로 의도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상호적으로 또는 순환적으로 

평형 혹 조화를 유지시키는 변화들에서 생겨나는, 

은유로서, 일종의 불변(invariant) 개념은, 

자아 개념에 접근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이러한 은유가 이행되는 곳은, 

부여된 값을 일정한 한도 내에서 유지시키는 

되먹임 메커니즘들이 순환적으로 배열된 곳, 말인즉, 

'폐회로(closed loop)'입니다. 

 

그 메커니즘들은 불변값에 접근하기 위해 작동하지만, 

그러한 불변이 성취되는 것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그런 것처럼 

꾸준한 버팀 혹 저항으로가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상쇄(相殺)되는 과정을 거쳐서입니다. 

 

우리가 되먹임 회로를 들여다보게 될 때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인접한 과거 행위에 맞서 있지만 

이미 인접한 미래 행위로 보상 혹 상쇄되는 중에 있는 

현재 행위입니다. 

 

따라서, 

시스템이 획득하는 불변의 것은, 

그 본성에 따라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관계(relationship)들로 

- 관계들은 '것'들 속이 아니라 '것'들 사이에 있습니다 - 조성되기에, 

결코 단 하나의 요소로 발견되거나 동결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내 제안한 것처럼, 

관계들로 조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경험 대상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활동-장소(locus)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심장에 있지도, 

오늘날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 어디에도 있을 데가 없지만, 

우리의 구별하고, 관계짓는 행위들이 연속되는 가운데 그리고 

우리 경험은 진정 우리 것임을 유지토록 하는 직관적(intuitive) 확실성 가운데서 

그저 자신을 현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 p.p.186-7: ‘사이버네틱스, 경험 그리고 자아 개념’ [1970] 

 

 

모든 이론은 진짜로 여겨져, 의심할 바 없이 당연시된 사실을 이론 구성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나온 결과가 모든 이들이 당연시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그저 토톨로지 형식을 반복한 것에 불과할 것이고, 

그런 이론에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RC는 출발 전제로 삼은 것은, 

바로 우리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서 출발했다. 

시대를 달리한 이론들도 분명 그 시대에 당연한 것들로 여겨진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며 그 출발점이 의문시되는 경우, 

그 이론 자체 또한 당연히 의문시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이 일정한 한도 내에서 사용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가 아닌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출발 전제가 부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 

당대의 당연시되는 것들에 대해 의심이 일반화된 경우가 아닐 때, 

이를테면, 우리 생각과 지식은 우리 뇌에서 일어나고 거기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 자아도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러한 당연시들을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고 이론이 완전히 전개된 이후, 

그리고 그 전개에 모순이 없고, 나름 일관된 모습으로 인정된 이후, 

그 이론으로 나온 어떤 귀결이 자기 출발점을 부정하는 시사점을 가질 수 있다. 

 

말인즉, 

생각은 뇌에서 일어나고 지식도 뇌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거기서 당연한 것으로 귀결된 그리고 전제되어야 할 여기 철학적 '나'와 같은 것이, 

이론 전개 이후, 

과연 뇌 안에 있는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폰 글라저스펠트는, 은유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왜? 신비한 것이니까! 

 

이것은, 

생각의 나무가 자라서 

자기 뿌리로 그 최종적 성장이 맞닿을 때 일어나는 일이며, 

글라저스펠트의 RC 또한 

독자의 생각하기와 반성하기를 거쳐 독자의 구성론으로 완결된 이후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며, 완결되었다면, 자연스레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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