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이름지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설명 불가에 대해 침묵해야 할 구성론적 이유

신학에서, 신의 실재성(實在性), 

인간 알기 이론에서, 경험 너머 실재(實在), 

우리가 경험으로 마주하는 세상의 실재성(實在性)은 유추적이다. 

 

구성론 관점에서, 

이러한 실재 혹은 세상의 실재성의 구조나 본성에 대한 것은 

합리적 알기 이론의 대상이지도, 대상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 알기와 행하기를 한정하는 제약으로서,

이러한 실재성을 우리는 우리 경험에 의거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지시 불가능한 바에 이름 붙이는 일이 

그 바를 언급하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하튼 무명이다; 

천지의 시작일지라도 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말하는 것, 즉, 최악의 기만이다.

 

실재와 실재성에 대해 알고 있는 척, 아는 체 하면서 

그것을 권력의, 강압의, 그리고 자존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경험 주체가 맘만 먹으면, 혹은 합리적 구성에 모순만 없다면, 

무엇이든 통할 것이라는, 계속해서 시도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부추기는 이들 또한 있다. 

 

전자의 기만과 후자의 소박이 만나 

우리의 기만적 현실이 창발한다. 

 

오늘날, 아이들한테 

‘하면 된다’(‘Anything goes’나 ‘Let it go’)는 식의 주문을 거는 문화적 조류는, 

이내, 그들이 겪을 세상의 제약들에 대해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기회와 심적 공간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는 체하는 목표들로 이끌어 

소수의 성공과 다수의 실패라는 참극의 일상을 만들어낸다. 

 

실재성을 부정할 수 없는 또 다른 우리 경험은 

타자들에 대한 경험이다. 

 

타자들에 대한 강압 경험이 있는 이라면, 

반성이 찾아오는 순간, 

강압 이후 타자는 더 이상 자신의 경험, 혹은 스킴을 확증해주는 역할, 말인즉, 

자기 세상을 버티게 해주는 기둥으로서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다. 

 

고로, 

타자 구성에 있어 그 기초로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은, 바로, 

세상의 실재성, 경험 너머 실재의 긍정과 관련된 타자에 대한 관점이다. 

 

알 수는 없지만, 

없지는 않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 경험 너머 ‘실재’라고, 

우리가 마주하는 실재하는 ‘세상’이라고 단정한 것을, 

어느 종교에서 신이라고 혹은 

다른 ‘무엇’이라 부르며, 

그것은 

인간적인 그 어떤 것으로도 묘사, 기술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존중할 수 있는 것은, 

그 말하는 이의 그와 관련된 경험이지, 

그러한 아이콘 같은 것의 반복된 주문(呪文)이 아니다; 

이는 결코 존중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경험이나, 

우리의 마주하는 세상에 대한 기적 같은 경험이나, 

그러한 것은, 

절대적 사적 영역에 대한, 전적으로, 

시적인 은유와 같은 것으로, 

그리 말하는 것 이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