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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가 오해한 다윈의 '진화론'과 슬로건 '자연선택=적자생존'의 만연

다윈과 달리, 스펜서는 

진화는 <직선적이며 평형의 최종 상태에 도달, 종결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물학적 진화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하여, 

생물학적 진화 이론에서, 생명이 그런 것처럼, 

사회란, <더 낮은 형식에서 더 높은 형식으로> 진화, 변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스펜서는 

인간의 마음도 같은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스펜서만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이후, 

19세기 꽁뜨, 헤겔, 등등, 위대한 사상가들까지 동조했던 이러한 사고는, 

사회나 역사 발전에 적용되어 200년 이상 전가의 보도가 된 직선적, 나선적 일방향성 개념, 말인즉, 

오늘날 진보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의 기원 [page] 49에서 다윈은 

스펜서의 용어 '적자생존'의 유용성을 평가하고 있다.

 

.... 나는 각각의 약간의 변이가 유용할 경우 보존되는 원리를 자연선택이라 칭한 목적은, 그 보존 원리와 인간의 선택 권능의 관련성을 지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씨가 자주 사용한 표현, 적자 생존은 더 정확하고 가끔씩은 더 편리하다. 인간은 분명 선택으로 위대한 결과들을 산출하고 있으며 유기체들을 자신 자신의 사용에 적응시킬 수 있다는 걸 보아 왔다; 자연선택으로 인간한테 주어진 작지만 유용한 변이들의 축적을 통해. 하지만, 자연선택은, 이후 보게 되겠지만, 언제든 행할 준비가 된 권능으로, 인간의 유약한 노력과는 가늠 못할 우월함 비슷한, 그리고 자연의 그러한 작업들은 예술 작업 비슷한 것이다.

에서,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을 ‘더 정확하고 가끔씩은 더 편리하다’고 한 다윈의 언급이, 

‘자연선택 = 적자생존’이라는 이후 광범위한 사용을 가져온 근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후 맥락에서 볼 때, 자연선택에서,

표현 ‘선택’은 

‘보존 원리는 인간의 선택 권능과 관련성 지시을 위해서’이고, 

이후, 표현 ‘자연’은 

‘언제든 행해질 준비가 된 <권능>’을 갖춘, 인간과는 ‘<가늠 못할>’ 무엇이며, 

그것, '자연선택'의 행함은,

<원리나 법칙에 따르지도 재현이 가능하지도 않은> ‘예술’과 같은 바로 지시하고 있다.

 

이는, 사이버네틱스에서, 

관찰자가 관찰하는 유기체의 환경을 그 유기체는 자신의 환경으로 알아볼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관찰자한테 

그 환경은 분명 그 유기체의 ‘자연’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유기체를 관찰하던 관찰자 그 자신이, 반성으로, 유추로, 

관찰자 자신이 그 자신의 환경/자연이라고 여긴 것은 

자신이 구성한 환경/자연이지, 자연선택에서 ‘<자연>’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윈의 ‘자연’은 명확히 유기체한테 

그 유기체 경험 너머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 과정에서, 

관찰자 관점과 해당 유기체의 변이와 적응 관점을 오가면서 상대적 의미 차이들이 있을 수 있어도, 

그 ‘자연’이 갖는 위치는 선명하다. 즉, 

칸트의 ‘물-제체’와 같은 발견적 허구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칸트는 이 자연을 대문자 '연'으로 썼고, 

통상, '대자연', '대우주'라는 표현으로 이를 지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체에, 특정 기간 또는 순간, 

어떤 특질을 소지한 혹은 소지하지 않은 개체들은 제거될 수 있다. 

그 제거는, 실상, 

연속된 개체적 사건들 혹은 일단의 개체 집단의 사건들이다. 

살아남은 류나 종의 분류는 

계통적 결과들이, 관찰자한테, 포집될 때 가능한 일이다. 

유사하게, 유기체들에 대한 관찰자인 인간 자신의 생존과 관련해서, 

인간 또한 자신이 구성한 환경이 아닌 외적 환경, 즉, 

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상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다. 

인간 개체가 

자신의 경험 세계를 더 이상 관리 다룰 수 없는 상태로 좌충우돌을 계속한다면, 

그 개체는 ‘연’한테 선택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이다;

(이때 선택이란 제거됨의 선택이지 살려줌의 선택이 아니다.) 

이는 인간 관찰자가 합리적 생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 이상을 너머 그 ‘연’의 체가 인간 개체를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는가 하는 건, 

그런 까닭에, 침묵의 영역이며 함묵해야 하는 바다.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에 대한 다윈의 기꺼운 승인은 

이 개념을 자신의 자연선택 개념에 동화시킨 결과로 보인다. 

즉, 맞아들어갔다는 것(적)은 자연의 체 사이를 통과했다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는 것, 

이와 반대로, 스펜서의 경우, 

맞아들어감의 의미는, 

사회, 역사적 시기 마다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선택해 우리가 쌓아올린 구성물로서 환경에, 말인즉, 

우리 스스로 설정한 제약들에 우리 개개인들이 적응한 경우로 해석된다. 

고로, 스펜서의 또는 다른 이들의 사회, 역사적 발전의 전진적 해석은 이리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이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선택해 구성한 환경에 

성공적으로 맞아들어가는 적자(성공)들의 전진으로....

재차 그 적자들 중심으로 선택 조성되는 환경.... 

다시 그 환경에 적자들이 살아남아....

이것이 사회, 역사적 진보다....

 

이러한 주문을 외우고 외우게 하며, 아무런 반성 없이 전파시켜며,

경쟁을 부추기며,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로 아직 살아 있다.

 

적자 아니었던, 적자이기를 거부했던, 적자로서 살 수 없었던 이들이 

새로운 환경, 문화의 설계자가 될 때에야, 

통합, 집중, 확장, 확대, 글로벌, 국가...등등의 슬로건은 

해체, 분산, 축소, 자족, 지역 , 공동체, 연합..등등한테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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