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아차리는 세상’에는, 세상 속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관념을 되뇌려는 의도는 없다. 이와 관련해, 세상(世上) 속 존재한테 세상은 자신을 현시한다는 아이디어 “world disclosure”는, 구성론에서는, 능동적 인지 주체의 자신의 경험 이해하기오서 세계(世界) 창조하기라는 관념으로 대체된다.
그 표현은, 그것이 아닌, 삐아제의 관념, <우리의 경험-세계 구조를 결정짓는 상당수 개념들은, 두 살 이전, 쌓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때인 감각운동 시기에 구성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로, 스펜서가 그토록 우아하게 말했던 것처럼, 성인(成人)들로서:
그와 같은 우주에 대한 우리 이해하기의 시작은, 그 우주가 펼쳐 보여주는 현시/출연 발견하기가 아니라, 그 우주가 생기도록 우리가 최초로 했던 것 상기(想起)하기다 (Spencer Brown, 1973, p.104).
에서,
스펜서 브라운의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형식의 법칙들 서문 설명을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삐아제 식으로 표현하면,
아이가 반사로 경험의 경계면을 마주하면서,
그 경계면에서 최초로 행하는 구별일 수 있다.
이러한 구별의 구성 요소는 셋이다.
능동적 에이전트의 주의라는 칼(ratio)로,
(질적 구별이 없고 오직 양적 차이만 있는 것들이 잘려져 나오는)
경험의 경계면(스펜서는 이를 공간이라 표현했지만,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시공간의 공간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에서,
주의가 공간을 가르며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구별이다; 요컨대,
주의, 배경(공간), 전경(구별)이 되겠다.
** 윗 인용문에서 언급된, 하이데거의 '세상 속으로 던져진 존재'는,
내가 구별한 '세계'와 '세상', 그리고 이 둘을 포함하는 '일반어'로서 '세상의 구별에 입각한 표현이다.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637
통상, '세계 내 존재'로 번역되지만, 내 구별에 입각하자면,
하이데거가 제약에 기반한 구성물로서 세계 속에서 그 존재를 언급할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저자 또한 그것이 형이상학적 관념임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보아,
나의 해석이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세상(世上) 속 존재한테 세상은 자신을 현시한다는
아이디어 “world disclosure”는,
구성론에서는,
<능동적 인지 주체의 자신의 경험 이해하기오서 세계(世界) 창조하기>
라는 관념으로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