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빈 서판' 또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와 비슷한 형식들이 지닌 맹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소위, 무(無)나 공(空)이라는 용어로 지시되는 상태는, 

경험하지만 알 수 없는 것들에서 오는 신비감보다도 

더 강력한 신비를 자아낸다.

 

그러한 바로부터 무언가를 내오는 것은, 통상, 

각 문화권의 창조 설화들에서, 

심지어는, 

그러한 바에 대한 다중의 승인을 기초로 

이론 전개의 전제(이를테면, 절대정신)로까지 사용되는 것처럼, 

쉬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 관점에서는 명백한 기만이다. 

아무 것도 놓이지 않는, 기초 없는 구성물이란,

사상누각보다 못한 꿈 속에서 스치는 환영일 뿐이다.

환영에 밑돌을 집어넣는다고 그것이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삐아제의 발생적 관점과 이러한 기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를테면, 

허구가 실재에 대한 재현과는 무관하다 하여 

그 허구를 무나 공으로 보지 않으며, 

스펜서-브라운이 무표시 공간을 

무나 공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스펜서가 그의 책에 에피그라프로 선택한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에서 '무명'은, 

가리켜지지, 지시되지 않는 것이 지시됨으로써 

모든 것들이 생겨나는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그 무명은 

아무 것도 없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나 '공'이 아니다.

 

지시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지시된 것과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게끔 

공리로서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무, 천지지시’가 아니라 ‘무명, 천지지시’인 것이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