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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쉬타인이 <‘의자’ 말하기와 의자 ‘모양’ 말하기 사이 차이> 주목으로 해낸 것

 1953년의 철학적 탐구에서 ... 그는 단어의 ‘신호’ 기능을, ... 재연 생성에 의존하는 ‘상징’ 기능에서 깔끔하게 분리하고 있다. .....

     표현 ‘언어 게임’은 핵심 슬로건이 되었다. 이 슬로건은, ...  수많은 이들한테, 언어를 특정 사회의 모든 성원들이 공유하게 된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오도(誤導)했다.            

     내 조망에서,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해석이 고려치 못한 것은, 비트겐쉬타인이 이들 두 가지 요점을 프레게 준거(準據) 이론과 <30여 년 전 자신이 Tractatus에서 썼던 것들> 상당수에 대한 그의 반론의 일환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의 후기 저작 1부에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단어들은 관찰자와 독립된 대상들을 지시한다는 생각(觀念)을 깨부수는 것이었으며, 그 일을 그는, <‘의자’ 말하기와 의자 ‘모양’ 말하기 사이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훌륭히 해냈다(ibid., par.35). 비트겐쉬타인 왈, 의자는 가리켜질 수 있으나, 모양은 그럴 수 없다. 

     실상, 어떤 언어에든, 지각 가능한 지시된 대상들을 그저 가리키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의미를 갖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다. 모양이 좋은 사례인 까닭은, 누구든 이것을 색깔을 보는 방식으로 볼 수도, 뜨겁거나 찬 걸 느끼는 방식으로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단어 ‘모양’의 의미는, 고로, 감지들이 집어낼 수 있는 독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 이 사례로, 비트겐쉬타인은 논리주의자들의 준거(準據) 이론을 아주 성공적으로 반박했다. 그러나 그는 단어 ‘모양’을 위한 의미가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에서,

 

<‘의자’ 말하기와 의자 ‘모양’ 말하기 사이 차이>에 주목한

철학적 탐구 34, 35절 (nhk 번역)

 

34. 하지만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자:  “모양을 주시할 때면 항상 같은 일을 하지요: 내 눈은 윤곽을 따라가며 나는 ... 느끼죠”. 그리고 이 사람이 또 다른 사람한테, 특정 둥근 대상을 가리키며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며, “그것은 <원(圓)>이라 불린다”고 그럴듯한 정의를 주고 있다고 하자 — 청자가 화자 눈이 그 윤곽을 쫓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그리고 그 화자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 청자는 그 정의를 달리 해석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그러한 ‘해석’ 역시, 이를테면, “원을 가리킨다”고 들었을 때, 그 청자가 그때 <그 단어>를 사용한 방식에; 그가 가리킨 것에 달려 있을 것이다 — 해서, 그러그러한 방식으로 그 정의를 뜻하려는 표현이든, 그러그러한 방식으로 그 정의를 해석하는 표현이든, 그 어떤 것도, [그러한 정의(定意) 주기 그리고 듣기를 동반하는 {과정}]을 상징(代身, 代表, 再現)할 수 없다. 

 

35. 물론, (이를테면) 모양 가리키기와 같은 “개성적(個性的) 경험들”이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손가락이나 눈으로 자신이 가리킨 바 윤곽 쫓아가기 같은 것이다. — 하지만, 이런 일은 내가 그 모양을 뜻하고자 한 모든 사례들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더 이상 다른 그 어떤 개성적 과정도 이들 모든 사례들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 게다가, 그러한 것이 모든 사례들에서 재발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 여건에, 즉, 가리키기 전후 일어난 일들에 — “그가 가리킨 것은 색깔이 아니라 그 모양이었다”고 우리가 말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 달려 있을 것이다.

   

“모양을 가리킨다”, “모양을 의미한다”, 그리고 등등의 단어들은, “(저 책이 아닌) 이 책을 가리킨다”, “그 테이블이 아닌 그 의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등등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 “이것을 가리킨다”, “저것을 가리킨다”와 달리, “모양이 아닌 색깔을 가리킨다”, “색깔을 의미한다”, 등등을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배웠는가만을 생각하라. 반복하면: 일정 사례들에서, 특히 누군가 ‘모양’이나 ‘수(數)’를 가리키고 있을 때 개성적 경험들이 있고 — 그 경험들이 (항상은 아니고) 자주, 모양이나 수가 의도된 경우, 재발하기 때문에 — ‘개성적인’ 가리키기 방식들이 있다. 하지만, 당신 역시 하나의 장기판의 조각 하나를 하나의 석류석에서 하나의 조각인 것처럼 가리키는 개성적 경험에 대해 알고 있다. 전적으로 다름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뜻하고자 한 것은, 이 조각을 ‘왕’으로 칭한 것이지, 내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이 구체적 나무 조각을 칭한 것은 아니다.” (알아보기, 소망하기, 상기하기, 등등)

 

요컨데, 이를테면,

모양이나 수(數)와 같은 경우는 

그 어떤 단어로도 그것을 경험하거나 지닌 자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단어들은 관찰자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대상들을 지시한다>는 

생각, 관념을 깨부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