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지식은 도구로, 틀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반면, 계시라는 신비적 지혜는 의문시될 수 없으며 자체로 종결된 것이다.>
말인즉,
과학적 지식의 존재 이유는 진리에 있지 않고, 그것의 바이어빌리터,
즉, 유용성과 확장성에 있으며,
신비적 지혜의 존재 이유는,
어찌 얻었든, 그 지혜의 소지자한테,
유한한 무한성과 같은 것을 일깨우고,
그 상태를 유지케 하는 것이다;
유한한 무한성과 같은 것이란,
인내천, 알 수 없는 세상, 침묵해야 할 신, ...
등등과 같은 이름지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름지어진, 그러나 가리킬 대상이 없는,
그래서 "무명"인 바다. 그 바에서 '천지'가 시작된다.
오늘날,
과학적 지식과 시적 지식으로
지식 개념의 분할을 승인하지 않는 이들로는,
우선, 쪼그라들어, 알아치리기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정말 진정 신비롭다할 영역을 인정치 않는 진리의 전사,
과학 무소불위, 절대 지위라는 과학 만능주의가 그 하나고,
신을 이성으로 조작하는 형이상학자들이 다른 하나다.
둘 다,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알 수 없음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급이다.
그들은
그 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권위와 권력이 자신들한테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한쪽에서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적으로 사적인 신비적 지식을
주님의 계시 또는 신비의 현시로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한테 그들 객관성에 복종하는 것을,
그들 신비적 지혜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어느 쪽에 줄을 서든,
세상을 마주하는 개체의 자율적 의지와 판단은 마비된다.
실용적 권력을 다투며 줄 세우기 경쟁이 치열해질 때마다,
과학과 종교의 전쟁이라는 모습을 띠게 된다.
양쪽의 전위부대 뒤에서,
그들의 그러한 세계관을 북돋는 비판적 실재론은,
각기 처한 이해, 속박된 연에 따라
분파(학파/정파/종파)를 달리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