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로크가 말한 일차 성질들로 언급된 모든 것들이,
삐아제의 경우,
아이의 발달적 과정에 대한 가설, 관찰, 실험으로 구성, 확증하였고,
이 텍스트에서는,
개념 분석의 형태로, 시간, 공간, 운동, 그리고 '수' 개념에 이르기까지
구성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플라톤의 <동굴 밖 이데아> 모델의 버전들을 반복하면서,
왜 이러한 것들의 실재성에 대한 미련에 강하게 붙잡혀 있는 걸까?
대상의 실재성에 대한 포기는 시도될 수는 있어도,
그리고 가끔씩 그 포기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개체가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대체하는,
확고한 대안적 생각하기와 행하기 방식을 장착하기 전까지는,
포기하려다가도, 실상 포기했다 하더라도,
강력한 빽워드에 걸려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들도
예외인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위와 권력이 크거나 강력할수록,
인습적/전통적 관행/습과 같은,
개체적 각성 이후에도 벗어나기 힘든 강고한 문화적 제약들이
너무 가혹할 수 있기에,
이전 그대로 살기 위해,
삶의 양식의 전면적 변화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그 타협을 정당화 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점을 얻고자,
붙잡아야 하는, 그리고 결국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감각의 기초에서 실재성을 담고 있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것은,
대안이 아닌, 노골적이지 않은, 알아먹기 힘든,
교묘하게 포장된, 미련이라 불리는, 끊긴 동아줄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크왈리아(感覺質)라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최소화된 권위와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그러한 밑도 끝도 없는 양자화된 기초라도 필요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경험론적 소박실재론, 말인즉, 소박한 유물론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철학하는 문턱을 넘는 것이지만,
문턱을 넘자마자 그들 개체로서 각성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적 실재성과 절연하지 않은, 못한
이들의 텍스트와 언설들이다.
아무리 훌륭한 안내자라도 길을 찾는 이한테는
그저 또 하나의 제약, 기껏해야, 나중에서야 선한 지시자로 확인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