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타 개인들에 대한 구성이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 의존한다는 점은,
여타 합리적 지식이론들과 마찬가지로
구성론에서도 흐릿한 영역, 윤리,
그 방향으로 이끄는 귀결을 하나 갖고 있다.
그 영역이 불명료함에도,
개체가 생각하기와 행하기 방식들의
상호주관적 바이어빌러티를 확립하려면
타자들의 확증이 필요 하다는 사실에는,
자율적 구성자로서 타자들에 대한 염려/배려가 수반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우리 생각에 따르도록 강제할 경우,
우리는 그들을 확증 제공자로서는
실상(ipso facto) 무력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칸트의 ‘실천 명법’의 또 다른 정식이다:
당신 자신만이 아닌 타자들한테도 있는
인간성을 결단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항상 행하라. (Kant, 1785, p.429)
생각하기 존재들은, 그의 설명으로,
그들 각자의 목적(存在-理由)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다른 여하한 목적으로도 교체되면 안 된다 (ibid., p.428).
엄밀히 말해, 이는
‘윤리적’ 준칙이 아닌
윤리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이 조건으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배려해야 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모든 윤리 철학들은
암묵적으로 이러한 전제(當然視)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구성론은
그 기본적 이유를 최소한 하나는 제공한다.
이러한 조망에서,
개체로서 주체한테
생각하기와 행하기의 상호주관적 바이어빌러티를 확립하기 위한
여타 다른 사람들의 필요(必要)란,
그러한 타자들에 대해 조마조마(念慮/配慮)하는 마음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 배려되어야 하는 까닭은,
더욱 견고한 경험적-실재(現實) 구성에 있어
그 무엇도 그들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체로는
여하한 윤리–준칙도 구성하지 않지만,
윤리 발달을 위한 합리적 기초 하나를 주고 있다.
내 강조하는 바,
행위나 사고 스킴들의 바이어빌러티는
언제나 특정 목표들과 관련되어 가늠되기에,
윤리(ethics) 자체는 정말이지
실제로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 기초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윤리가 반드시 그 자신을 현시해야 하는 곳은
바로 목표들 선택하기에서다.
**ethics: 한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도덕적 ‘원리(準則)들 또는 원리들의 체계
에서,
<윤리가 반드시 그 자신을 현시해야 하는 곳은 바로 목표들 선택하기에서다.>라면,
윤리학(ethics), 즉,
‘개개인들한테 있을 행위 준칙들의 체계에 관한 연구’는
철학의 분과에 속하기보다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연구 주제에 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지발달의 성숙에 따른 규범들 조정, 즉,
도덕(moral)은 모순되는 규범들로 가를 칠 수 있으며,
또한,
사회적 여건(제약들)에 따른 목표 목록들 조정, 즉,
윤리는 오로지 회피나 제약으로서 좌절을 야기함으로써만
변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해서,
특정 개인의 도덕을 조성하는
규범들의 기초적 원리로서
윤리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들 가운데 나타나는
일련의 행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