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rise de conscience’은, 통상,
‘prise’를 ‘파악 또는 포착’으로 이해하는 경우,
‘자각, 의식화’로 옮겨진다.
이러한 해석은 의식이란 것이,
원래부터 또는 생겨난 다음에,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그 어디에서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조장한다.
하지만,
RC(1995) 폰 글라저스펠트의 주석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prise’를 이어지는 추상명사의 상태에 도달(到達)하는, 혹은
그 추상명사의 그 상태가 개시(開始)되는 것으로 해석될 경우,
그 뜻으로, 의식이란,
일정한 조작, 반성 과정에서
그에 실려 기능하는 능동적 에이전트가,
자주 멈칫거리며 자기 자신의 조작, 반성 과정을
주시, 주목하는 ‘상태에 도달한 또는 그 상태를 개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의식 상태에 이르러
이러한 주시, 주목이,
좀 더 발달된 소급적 주제화 같은
그와 같은 반성된 생각을 하고 있는 과정 그 자체를
재차 멈칫거리며 주시, 주목하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앞서(3장, 삐아제 구성론적 알기 이론), 번역에서,
이 구절을 ‘의식의 개시’라고 번역할 수는 있으나,
‘의식의 도달’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도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할려면,
‘의식에 도달’ 또는 ‘알아차림에 도달’이라고 했어야 했다;
영어 ‘of’에** 습관적 번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 1장에서, 전치사 ‘by’로 보여준 다양한 개념적(개념 형성) 관계들을 참조하건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of’가 의식과 도달 사이, 그리고 의식과 개시 사이,
각각에서 지시하는 개념 형성 관계가 다르다.
전자는 의식에 다다른 것이고,
후자는 (어찌 다다랐던 다다른 시점의) 의식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의식이란,
일정한 조작, 반성 과정에서
그에 실려 기능하는 능동적 에이전트가
자주 멈칫거리며 자기 자신의 조작, 반성 과정을
주시, 주목하는 ‘상태에 도달한 또는 그 상태를 개시하는 것을 가리킨다(mono loop).
이어, 그러한 주시, 주목이
좀 더 발달된 소급적 주제화 같은
그와 같은 반성된 생각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double loop),
재차 멈칫거리며 그 과정 자체를 주시, 주목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triple loop).
우리는 바로 이 층위에서 그 소급적 주제화에 대해 이름-붙이기를 할 수 있다)>는,
RC(1995) 텍스트에서 인용된 삐아제의 다음 구절의 패러프레이즈다.
끝으로,
특정 반성적 추상이 의식된 경우,
우리는 그것의 그러한 결과를 ‘반성된’ 추상이라 부르며,
우리는 이를 그 층위에서 벗어나서 행한다.
(Piaget et al., 1977a, Vol 2; p.303; 폰 글라저스펠트 강조)
이와 관련하여,
<의식(알아차림)은
그 의식(알아차림) 자체를 의식할(알아차릴) 수 있다>는 표현을 숙고할 경우,
우리는 윗 인용구 문장을 보면서,
연달은 알아차림(意識)의 층위(수준) 이동을 추상하여,
<의식은 그 의식 자체를 의식할 수 있다>고 표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을 제공한
그 어떤 것에 대한 반성과 추상 과정이 재차 시작되지 않는 한,
그러한 표현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훗설 말마따나, 의식은 항상 그 무언가의 의식인 것이다.
고로,
의식적 생각, 사고, 사유가
과학적 지식의 산출, 재산출, 숙고 과정에 있든,
시적 지식의 산출, 그와 관련된 숙고, 명상의 과정에 있든,
의식은, 항상, 그 무언가의 의식인 것이다.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지만,
그와 관련된 신비한, 기적 같은 것들에 대한 호기심의 유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알기에 대한 고찰을 보건데,
그것이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자체로 기능할 수 있는 경우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제까지 내가 아는,
구성론의 의식에 대한 입장이며,
이 경계를 넘어가는 발언은,
방어할 수 없는 지점들을 만들어내기에,
‘침묵해야 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해당된다.
참고:
프랑스어에서 ‘conscience’은,
의식과 양심을 모두 의미하는 단어며,
영어에서도 의식(consciousness)과 양심(conscience)은 같은 기원을 갖으며,
독일어에서도, 알다(wissen), 알아차린 또는 의식하는(bewusst), 의식(Bewusstsein), 그리고 양심(Gewissen)으로 표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어에서,
의식이란 '알아차리는 일'이 된다.
단어, ‘알아차리다’는, 알다에 기원한 단어로,
의식 상태에서 마주보는 것을 정렬, 반성, 반성된 생각으로 펼쳐내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로, '알아차리다'가 마무리된 이후 '깨닫다'가 진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깨닫다'는, '깨다+닫다'로,어떤 조작적 과정에서 벗어나 그 과정을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 맥락들에서,
두 단어는 '어떤 과정에서 벗어나 그 과정을 주시하다'는
같은 의미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