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레오폴드 코르

뉴 래디컬리즘 - Leopold Kohr



Leopold Kohr

레오폴드 코르


First published in Resurgence under John Papworth's editorship in 1967
1967년 존 팹워쓰가 편집자 였던  '되살림'에 처음 출판됨 


The question has frequently been asked: Is radicalism dead? With the advent of the affluent society, which the Labour Party's socialist reforms did so much to usher in, have not all its aims been fulfilled? What can Labour still be radical about?


빈번히 묻곤 하는 질문: 급진주의는 죽었는가? 노동당이 사회주의 개혁으로 이끌었던 풍요로운 사회가 도래했다 하더라도, 그 개혁의 모든 목표가 실현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노동당을 계속해서 급진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Before one can answer the question, it is necessary to have a clear picture of what radicalism really means. Obviously it is an ideology urging change. But this would turn everybody into a radical. For who does not want change? Life itself is change - the change of seasons, of growth, of ageing, of generations. What characterises a radical is that he desires change at an accelerated pace. Hence the first criterium concerns a question of mood, of temperament. A radical is impatient. He wants change fast.


질문에 답하기 전에, 급진주의가 진정 의미하는 바에 대한 분명한 상(像)을 지닐 필요가 있다. 명백히 이것은 변화를 촉구하는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이들을 급진주의자로 바꾸려 했다. 대체 누가 변화를 원치 않는가? 생명 그 자체가 변화다:  계절이 변하고, 성장의 변화가 있고, 나이가 먹어가고, 세대가 변한다. 급진주의자의 특징은  변화를 가속적으로 바란다는 점이다. 그래서 첫번째 기준은 심정, 기질의 문제와 관계된다. 급진주의자는 참을성이 없다. 빠른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다. 


But so does a criminal anxious to kill a person long before his time is up; does this make him a radical too? There are quite a few who think so, and therefore reject all radicalism on grounds of temperament alone. But temperament alone is not the only element defining an ideology. It is also the purpose that counts.


하지만, 그처럼 어떤 범죄자가 아직 막장 상황이 아닌데도 살인을 갈망하는 경우; 이로써 범죄자 또한 급진주의자가 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므로 기질에만 근거를 둔 모든 급진주의는 무시하라. 기질이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또한 고려해야할 바이기는 하다.  


And the purpose of radicalism is not just to bring about change fast, but to do so in order to improve the human lot. The emphasis is on the human, not the social, lot. Considering society's practically indefinite span of life, no speed is needed to improve the social condition. Time's process of evolution will take care of this in the same way as it has taken care of the condition of ant and bee societies whose present stage of social perfection it accomplished without the need of radical assistance.


그리고 급진주의의 목적은 단지 빠른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운명의 개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강조점은 사회가 아니라 '인간' 운명에 있다. 실제 거의 무한한 사회의 존속 기간을 고려할 때, 속도란 사회적 조건의 개선에 필요치 않은 요소다. 진화의 시간 과정이 인간 사회에 관여하는 방식은, 급격한 도움 없이도 사회적으로 완벽한 현 단계를 달성한 개미, 벌 사회의 조건에 관여하는 것과 같은 방식일 것이다. 


But it is different with the human condition whose improvement must be accomplished within the brief span of life available to the individual. While society can thus wait, its citizens cannot. It is because of the latter that impatience and speed are both necessary and justified.


하지만 그런 사회적 조건은 한 개인의 짧은 생애 동안에 개선을 성취해야 하는 인간 조건과는 다르다. 사회는 그와 같이 기다릴 수 있는 반면, 그 사회의 시민들은 그럴 수 없다. 성급함과 속도가 필요하며 동시에 정당화되는 것은 바로 그 시민들 때문이다. 


This gives us two defining elements of radicalism: impatient temperament, and a purpose benefiting the human person.


이로써 우리는 급진주의를 정의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갖게 되었다: 참을성 없는 기질, 그리고 인간 개인(個人)한테 득이 될 목적.


But while this excludes the criminal, it would qualify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as a radical - a high minded reformer anxious both to improve the lot of individual man, and to achieve the results fast enough to improve his condition as long as he is still alive. Yet we know that the venerable clergyman does not quite fit our image of a radical.


이로써 범죄자는 배제되는 반면,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주교는 급진주의자로서 자격을 부여받을 것이다: 그는 개인들의 운명 개선을 열망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사는 동안에 그들 조건을 개선할 만큼 빠른 결과물들을 얻기를 열망한 고매한 개혁가였다.  우리는, 그렇지만, 존경할만한 성직자가 '우리의 급진주의자 상(像)'에 전적으로 들어맞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A third defining element is therefore necessary. The non-radical reformer is continuously hampered by institutions which, owing their origin in an outmoded social environment, have long frozen all human relationships into patterns of customs and law which resist change not because of conservative tradition or evil intent but because of the rigidities inherent in the structure of every established order. Yet, the non-radical accepts all this because of his fondness for ancient trimmings to which he sees no other alternative.


해서, 정의(定義)를 위한 세번째 요소가 필요하다. 급진적이지 않은 개혁가들은, 한물간 사회적 환경에서 생겨나 모든 인간 관계를 장기간 관습과 법의 형태들로 동결시켰던 제도(制度)들 때문에 지속적으로 방해받는다; 그것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보수적 전통이나 사악한 의도 때문이 아니라 모든 확립된 질서 구조에 고유한 경직성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非)급진주의자는 고래부터 다듬어진 이러한 것들 말고는 다른 대안을 알지 못하고 애호하기에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한다.


The radical, on the other hand, does not accept it. In his effort to overcome the delaying effect of existing institutions, he feels he must step outside the established order. He becomes a revolutionary.


이와 달리, 급진주의자는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제도들의 지연 효과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는 체제 질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그는 혁명가가 된다.


With this we have the three essential ingredients that go into the make-up of a radical. His temperament is impatient for change. His purpose is the improvement of the lot of individual man. His method is revolution - the attempt to accomplish his purpose through the use of tools beyond the reach of the established system.


이로써 우리는 급진주의자 구성에 필요한 핵심 요소들을 갖게 되었다. 그의 기질은 변화에 대한 조급함이다. 그의 목적은 개별 인간의 운명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의 방법은 혁명이다 - 혁명이란, 그의 목적달성을 위해 도구들을 확립된 체제(體制) 범위 너머까지 사용하려는 시도다.


It is this last criterium that distinguishes him from the well-meaning Archbishop who, though equally impatient for improving the human condition, tries to achieve it within the existing system.


이 마지막 기준이야말로, 급진주의자를 앞서 언급한 악의없는 대주교와 구별해 주는 것이다: 그는 인간조건 개선에 똑같이 참을성이 없었지만 기존체제 내에서 그것을 달성하려 했다.  


But what distinguishes him from a fascist or a communist?


그렇지만, 급진주의자를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Each of the two latter is impatient for change, and each aims at bringing about this change by stepping outside the established order, through revolution. Nevertheless they too fail to qualify as true radicals. For though they fulfil the requirements of the first and third criterium, they fall short in the case of the second. They want improvement, but not of man.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 모두 변화에 참을성이 없으며 확립된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혁명을 통해 일으키고자 한다. 그럼에도 그들 또한 진정한 급진주의자로서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첫번째와 세번째 기준이 요구하는 조건들은 충족시켰지만 두번째 기준에는 못미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선을 원했지만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Their concern belongs to society as a whole. In the interest of improving the stock, health, race, status, productivity and power of an organism whose longevity makes it practically imperishable anyway, they may sacrifice the short- lived human being by the millions.


그들의 관심은 전체적으로 사회에 관한 것이다. 유기적 조직체의 비축물(在庫), 건강, 경쟁, 지위, 생산성과 권력을 개선, 증대시키고 그렇게 그 조직체에 여하튼 실제 불멸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그들은 짧은 수명을 지닌 인간들 수백만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다.   


Rather than being the beneficiary, the individual citizen becomes the victim of their grand design, undertaken for the glory of a future he will not live to enjoy, and as oppressive in its effect on the living as a prince building pyramids and palaces. If he ventures to make reference to his own purposes, he is called a traitor and liquidated.


혜택을 받기는 커녕, 개별 시민은 그가 누리며 살지도 못할 미래의 영광을 위해 착수된 그들의 거대한 계획의 희생양이 되며, 피라미드와 왕궁을 짓던 왕자 만큼 사실상 생계는 가혹해진다. 개별 시민인 그가 그 자신의 목적에 대한 언급(言及)을 감행할 경우, 그는 반역자로 몰려 숙청된다. 


This is why neither fascists nor communists, neither Castros nor Francos, though revolutionaries and reformers both, are true radicals. They hurry where there is no need to hurry.


이것이 바로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들, 카스트로나 프랑코가 혁명가이자 개혁가이지만 진정한 급진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은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 곳에서 서두른다. 


They reform, but the wrong condition. This does not mean that the radical is insensitive to social reform. On the contrary. But he considers it the means, not the end of his aims. His end is the improvement not of the social but the human lot. The only question still to be answered is: what is exactly meant by improving the human lot?


급진주의자는 다만 잘못된 조건만을 개혁한다. 이것은 그가 사회적 개혁에 둔감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긴다. 그의 최종 목적은 사회적 운명의 개선이 아닌 인간 운명의 개선이다. 여전히 답해져야 할 유일한 질문: 인간-운명 개선하기란 정확히 무슨 뜻인가?  


Since the beginning of time, man's full enjoyment of life has been jeopardized by one principal condition: lack of freedom. This means that improvement as applied to the human lot can have only one meaning: liberation.


시초 이래,  인간 삶의 충분한 향유란 항상 한 가지 주요한 조건으로 위태위태 했다: 자유(自由)의 결핍. 이를 인간 운명에 적용해서 개선한다는 것은 해방(解放)이라는 단 하나의 뜻만을 가질 수 있다.   


The true radical is therefore a liberator. His purpose is to bring freedom to the individual.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그러므로 해방자이다. 그의 목적은 개개 인간들한테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He is not interested in a free society. The most tyrannical societies are free. For this reason, the freedom of society may often be the very cause keeping the individual in subjection. Rome was a free society. No other society could impose its will on it. But what good did it do to Cicero whose life it demanded as a sacrifice to its appetites? In our own time Switzerland is a free society in the sense that it has no sovereign above itself. But this of course also makes the Soviet Union a free society, or Communist China, or Nazi Germany, or Trujillo's Dominican Republic, Castro's Cuba, Franco's Spain, Tito's Yugoslavia. What the radical is interested in is a society of the free - a vastly different proposition. Improvement in the radical sense means therefore not improvement in diet, health, life expectancy. Every tyrant wants this for his soldiers; every exploiter for his workers.


그는 자유로운 사회에는 관심이 없다. 가장 전제적(專制的)인 사회들이 자유롭다. 이러한 까닭에, 사회의 자유는 종종 개인들에 대한 지배를 지속시키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 로마는 자유 사회다. 그밖에 어떤 사회도 자신의 의지를 로마에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로마 욕망의 희생양으로 생명을 요구받은 키케로한테 로마는 어떤 이득을 베풀었는가? 우리 시대 스위스는 그 위에 어떤 통치자도 없다는 의미에서 자유 사회다. 그러나 이런 뜻이라면 물론 소비에트 연합이나 중공, 또는 나치 독일이나 뚜르질로의 도미니크 공화국, 카스트로의 쿠바, 프랑코의 스페인, 티토의 유고도 자유 사회다. 급진주의자가 관심을 두는 것은 자유인들의 사회다 - 엄청나게 다른 명제다. 급진적 의미에서 개선이란, 그러므로, 음식, 건강, 평균수명에서 개선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한 몸적 개선은 모든 독재자가 그들 병사들을 위해 원하는 것이고, 모든 착취자가 그들 노동자들을 위해 원하는 것이다.


It means liberation - liberation from servitude; liberation from tyranny, including the tyranny emanating from society itself. A radical can be anti-social. He can never be anti-human.


자유인들의 사회, 그것은 해방을 의미한다 - 노예상태에서 해방; 사회 자체에서 풍기는 전제(專制)을 포함해서 폭정(暴政)로부터 해방. 급진주의자는 반사회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반인간적일 수는 없다. 


Since there are four types of circumstances capable of depriving the individual of his freedom, radicalism has in the course of history produced not one but four movements of liberation.


사람한테서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여건들에는 4가지 유형이 있기에, 급진주의가 지나온 역사에서 낳은 해방 운동은 하나가 아니라 넷이다. 


The first and most ancient was directed against religious superstition. The earliest radicals were therefore religious liberators. Fiercely resisted by the established order of priests, priest-kings, and god-kings, whose sinister power as sole interpreters of the divine will they had to break before they could liberate man from his terror of supernatural influences, each of them - Socrates, Christ, the Apostles - had to step outside the existing religious framework. Each was a revolutionary. And the freedom they brought was the first of the great freedoms that have helped man to realise his humanity; the freedom of mind, the freedom of conscience, the freedom to have his own identity, to be himself. Indeed by prying him loose from the collective haze of his superstitious group in which he had up till then been submerged like a diffuse image in a block of marble before the arrival of the sculptor, the religious liberators not only freed but created the individual. From now on his soul was his own, and God in him, not in priest, king, or society.


초기 대다수 고대인들은 종교적 맹신을 거부하도록 안내받았다. 초기 급진주의자들은 그러므로 종교적 해방자들이다. 성직자들, 성직자-왕들, 신-왕들의 확립된 질서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종교적 해방자이 하늘(신)의 뜻에 대한 유일한 해석자로서 그러한 사악한 권력을 깨부셨던 것은, 사람들을 초자연적 감화 또는 작용이라는 테러에서 해방시키기 이전 그들은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소크라테스,  그리스도, 12사도, 그들 각각은 기성 종교 체제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들 하나하나는 혁명가였다. 그들이 가져온 자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성을 깨닫도록 했던 최초의 위대한 자유였다; '마음의 자유, 양심의 자유, 자신의 정체성을 가질, 그 자신일 수 있는 자유'. 조각가가 다듬기 전 돌덩이에서 보이는 산만한 이미지와 같은 '맹신 집단의 집단적 몽롱(朦朧)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을 진정 깨닫도록 함으로써, 종교적 해방자들은 개인(個人)을 해방시켰음은 물론 창조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그의 영혼은 그 자신의 것이며, 신(God)은 그대 안에 있지, 성직자한테, 왕한테, 또는 사회 속에 있지 않다.     


However, having become conscious of himself, man soon began to realise that, though his mind had been set free, his person had not. He was a slave, a serf, a subordinate, human as any other but without status, without equality, without full dignity. The circumstance whose oppression he now felt most was no longer his religious but his political environment.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자, 이어 그 사람은 그의 마음은 자유로와 졌지만 개인으로서 자신, 즉, 신분(身分)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노예, 농노, 종복이었다; 지위도 없고, 평등하지도 않고, 온전한 존엄도 없지만 다른 이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그가 이제 주되게 느끼는 압제적 여건은 더 이상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환경이었다.


The new representatives of radicalism, frequently evolving out of religious radicalism, were therefore the political liberators. From the Gracchi of ancient Rome to the Wilhelm Tells of the Middle Ages and the Liberals of 19th century England, they had as their object the dignity of full citizenship and political equality for all.


따라서, 급진주의의 새로운 대표자들은, 종교적 급진주의에서 번번히 진화한, 정치적 해방자들이었다. 고대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들에서부터 중세의 빌헬름 텔 부자, 그리고 19세기 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까지,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완전한 시민권에 대한 존중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치적 평등이었다.   


To the freedom of the mind they wanted to add the freedom of the human person. And again they had to step outside the existing order committed as it was to hierarchy and privilege.


정치적 해방자들은 마음의 자유에다 인간 신분(身分)의 자유가 더해지는 걸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위계와 특권에 내맡겨진 기성 질서 밖으로 재차 벗어나야만 했다. 


To accomplish their aims, they replaced aristocracy with democracy, monarchy with republic, or absolute monarchy with constitutional monarchy. The change of system was not always violent. But it was always fundamental and revolutionary.


정치적 해방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귀족정치를 민주제로, 군주제를 공화제로 또는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었다. 시스템, 체제의 변화가 항상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언제나 근본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As spiritual liberation resulted in the quest for political freedom, political liberation now led to the quest for economic freedom. For without the latter, the former would have remained a vain achievement. The seemingly last mission of radicalism was thus the economic liberation of man.


영적 해방이 정치적 자유의 추구로 귀착된 것처럼, 이제 정치적 해방은 경제적 자유의 추구로 이어졌다. 경제적 자유 없는 정치적 자유는 공허한 성취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급진주의 외관상 마지막 사명은 그래서 인간의 경제적 해방이었다. 


Again the main obstacle lay in the existing order, this time capitalism which, though it had proved itself eminently capable of producing in abundance the goods necessary to insure a good life for all, seemed hopelessly at a loss when it came to distributing them in an equitable manner.


다시금 주요한 장애는 기성 질서, 오늘날 자본주의에 있었다; 그 체제는 모두한테 만족할 만한 삶을 보증하기에 필요한 상품들을 풍요롭게 생산할 탁월한 능력을 자체로 입증했지만, 그것들을 평등한 방식으로 분배하게 될 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보였다. 


The economic radicals therefore felt, that they, too, must step outside the established system if they were to achieve the rapid pace of improvement they desired. The new system they introduced was socialism.


따라서 경제적 급진주의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이 바라는 신속한 개선을 달성하고자 할 경우, 확립된 체제 밖으로 벗어나야만 했다. 그들이 도입한 새로운 체제는 사회주의였다. 


Transferring the central power of production from the individual to the state, it now became possible to re-transfer an increased power of consumption from the state to the individual, thereby liquidating the last of the circumstances obstructing the happiness of the individual - the fear and tyranny of poverty.


핵심적 생산 권력을 개인들한테서 국가로 이전시키는 일, 이로써 이제 증대된 소비 권력을 국가에서 개인들한테로 재-이전시키고, 그럼으로 인간 행복을 가로막는 여건들 가운데 마지막, 가난의 공포와 가혹함을 일소(一掃)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With this all seems to have been accomplished.


이로써 모든 것이 성취된 것 같았다. 


Religious radicalism had liberated man's mind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modern faiths such as Islam, Judaism or Christianity which should not be confused with the political organisation of these faiths in the form of church, mosque, or synagogue.


종교적 급진주의는 근대적 신앙들을 확립시킴으로써 인간 마음을 해방시켰다; 이를테면, 이슬람, 유대교 혹은 기독교의 경우, 그들 '신앙'은 모스크, 시나고그 또는 교회라는 형식의 '신앙 정치 조직'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Political radicalism had liberated his person by introducing representative liberal democracy.


정치적 급진주의는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개인, 인간 신분(身分)을 해방시켰다. 


Economic radicalism has liberated his bod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the socialist welfare state. Now the age of affluence has set in.


경제적 급진주의는 사회주의 복지 국가를 확립시킴으로써 인간 몸을 해방시켰다. 이제 풍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As a result, the question posed at the beginning seems indeed legitimate:


그 결과, 최초 제기된 질문이 참으로 합당하게 보인다: 


Is socialism a spent force?


사회주의는 그 효력을 다했는가?


And more than that: Is radicalism itself dead? Is there anything left that it could still achieve? Switch over from the improvement of the human to that of the social lot? And, in the process, re-enslave man in the grand manner of Egyptian kings? With the difference perhaps of putting us to work on traffic circles instead of Sphinxes? Or sputniks instead of pyramids?


그리고 그 이상의 질문: 급진주의 자체는 죽었는가? 아직도 성취할 수 있는 게 남아 있는가? 인간 운명을 개선하는 것으로부터 사회적 운명의 개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 왕들의 원대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다시 노예화시키는 것? 차이가 있다면 스핑크스 대신 원형 교차로에 붙어 일하게끔 된 점? 또는 피라미드 대신 스푸트니크(소련 최초의 인공위성)?      


And making us lay down our lives for the glory of the state or the improvement of future generations who will bear us no more gratitude than we hold for the past, and who will justly admire no one except the society-reforming monster who managed to extract our purposeless sacrifice?


국가의 영광을 위해 또는 미래 세대의 개선을 위해 목숨을 버리도록 하는 걸 보고도, 과거 우리가 품었던 정도의 감사를 그 누가 우리한테 표할 것이며, 무의미한 희생을 용케 우려내는 사회-개혁 괴물(怪物)을 그 누가 찬양할까? 


Actually, however, there is a fourth circumstance threatening the freedom of the individual, a fourth freedom to be secured, and hence a fourth type of radicalism.


사실상, 그럼에도, 안전(安全)하고자 하는 개인의 4번째 자유를 위협하는 4번째 여건들이 있고, 따라서 4번째 유형의 급진주의가 있다. 


And it is this, not liberalism or socialism, that is beginning to fight the battle for freedom in our age.


그리고 우리 시대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맞붙어 싸우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라, 바로 이 4번째 유형의 급진주의다. 


Unlike the others, the fourth threat to freedom has inadvertently but inescapably emerged as a by- product of the liberation from the third.


여타 위협들과 다르게, 자유에 대한 4번째 위협은 3번째 해방의 부산물로서 부주의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출현했다.    



For in order to fulfil its mission of freeing man from the iniquities of capitalist distribution, socialism had to increase first the scope, then the function, and finally the power of the state. And it is the power of the state that constitutes both the newest and the most terrible threat to freedom.


자본주의 분배의 사악무도(邪惡無道) 짓들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주의는 우선 제어할 범위를 확대해야 했고, 그에 이어 역할들을 늘려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국가 권력을 강화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자유에 대한 가장 참신하며 가장 무시무시한 위협을 조성한 것은 바로 국가 권력이 되었다.


For as this power increases, the danger rises that the tool of the citizen's welfare becomes the master of the citizen; and the pluralist state in which the individual is sovereign becomes the unitarian state in which the state is sovereign; that the society of the free turns into the meaningless self-glorifying concept of the free society of 1984.


국가 권력이 커지자, 시민 복지의 도구가 시민에 대한 지배자가 되는 위험이 상승한다; 개인이 주권(主權)을 갖는 다원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주인된 권리를 행사하는 중앙집권적 국가로 되며; '자유인들의 사회'는 오웰의 1984와 같은 의미없는 자기-찬양 개념인 1984와 같은 '자유 사회'로 변질된다.  


Though up to a certain point the interests of the two are complementary, they become mutually exclusive when the power of the state assumes such proportions that its sheer weight begins to obliterate the freedom-serving institutions which it had previously provided.


어느 지점까지 '그 둘'의 관심사는 상보적이지만, 국가-권력이 그와 같은 크기를 당연히 여겨 오롯이 자기 무게에 눌려 이전에 설립했던 자유-제공 제도들을 제거하기 시작할 때, 그 둘은 상호 배타적이 된다.


The fourth and last form of Radicalism is therefore no longer directed against capitalist exploitation, political privilege or religious superstition. Socialists, Liberals, and Christians have taken care of these. It is directed against the power of the state, symbolised by the swollen sponge of Parkinsonian bureaucracy.


급진주의의 4번째이자 최후의 형식은, 그런 까닭에, 더 이상 자본주의적 착취, 정치적 특권, 또는 종교적 맹신에 저항하는 방향에 있지 않다. 이것들은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제거해 왔던 것들이다. 최후의 급진주의는 파킨슨 병에 걸린 관료제라는 부푼 스폰지로 상징화된 국가-권력에 저항한다. 


Since this is proportionate to the size of society on which it feeds, it follows that the most modern form of radicalism, having again to step outside the existing order to accomplish its ends, must aim at centering social life in national communities whose size is so reduced as to render excessive governmental power both impossible and unnecessary. For what good is the welfare state if its costs of administration become larger than the benefits it yields?


국가-권력은 국가가 뜯어먹고 살 사회의 크기에 비례하기에,  최종 목표 달성을 위해 재차 기존 질서에서 이탈해야 하는 급진주의의 가장 현대적 형식은  과도한 정부 권력이 불가능, 불필요해질 정도로 크기가 줄어든 민족 공동체들에 사회적 삶을 집중시키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 국가의 행정, 관리 비용이 그것으로 인한 혜택보다 더 커지는 경우, 복지 국가는 도대체 뭘 위해 존재하는가?  


The new radicals are therefore the decentralisers, the federalisers, the regionalists, the regional nationalists (in contrast to the centralizing, expansionist and hence non-radical nationalistic power megalomaniacs) such as they begin to emerge in all corners of the world.


새로운 급진주의자들은, 그러므로,  세계 도처의 변두리에서 출몰하기 시작한 분권주의자, 연방주의자, 지역주의자, (중앙집권화하는 팽창주의자 그리고 그로 인해 비-급진적인 민족주의적 권력 과대망상환자들과는 대비되는)지역 민족주의자들이다. 


We need only to think of the old movement in such traditionally radical communities as Sicily, Catalonia, Brittany, Scotland, Wales, or of such newer ones as they have recently appeared in Nage, Quebec, Tibet, Goa, Somalia and elsewhere.


우리는 결국 시실리, 카탈로니아, 브리태니,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같은 급진적 전통 공동체들의 오랜 운동에 대해, 또한, 나게,퀘벡, 티벳, 고아, 소말리아 그리고 여러 곳에서 최근에 나타난 그와 같은 공동체들의 더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The freedom they offer to ensure the trinity of the other freedoms is the freedom from government, not in the economic sense of laissez faire but in a personal sense.


이상 3가지 자유의 일체성의 보장을 위해 새로운 급진주의자들이 제안하는 자유는, 자유-방임이라는 경제적 의미에서가 아닌  개인적 의미에서 정부로부터 자유다. 


As Gwynfor Evans, one of the most inspiring representatives of this new radicalism fighting to protect the individual from the tyranny of government, writes so succintly in his programme for an independent Wales:


정부의 전제(專制)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이러한 새로운 급진주의의 가장 고무적인 대표자들 가운데 한명인 그윈포 에반스가 독립 웨일즈을 위한 그의 공약에서 아주 간결히 쓰기를: 


'The decentralist would limit the power of the State…In a totalitarian order even the nation may be swallowed by the State, and this complete inversion of the right order has not been uncommon in our time. Still more often, in countries not rigidly totalitarian, we see within the nation religious, social and economic communities being weakened or destroyed by State action. This is a very grave loss, for these communities do much to develop man's personality and to provide bulwarks against the State 's erosion of individual freedom…The individual person must therefore be enabled to withstand the State when it overreaches itself. . . In the Welsh nationalist view therefore the nation is a community of communities, and the State fails in its proper function if these communities are weakened rather than strengthened by it.'


'분권주의자는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자 한다... 전체주의(全體主義) 질서에서는 민족조차도 국가에 빨려들어가 사라질 수 있으며, 정당한 질서의 이러한 완벽한 전도(顚倒)는 우리 시대에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경직되지 않은 전체주의 나라들에서도, 국가 활동으로 약화되거나 파괴된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공동체들을 민족 안에서, 변함없이 더 자주, 보고 있다. 이것이 아주 심각한 손실인 까닭은 이들 공동체들이 사람 됨됨이, 인격을 발달시키는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침탈에 맞서는 보루를 제공하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해서, 각 개인은 국가가 자기 한도를 넘을 때 국가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웨일즈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민족은 공동체들의 공동체며, 하여 그 국가는 이들 공동체들이 자기로 인해 강화되기보다 약해진다면 자기 본연의 역할에서 실패한 것이다.' 


Thus, while socialist radicalism may indeed have fulfilled its mission, radicalism itself is far from being dead. Its fourth manifestation is only just beginning.


따라서, 사회주의적 급진주의가 참으로 그 사명을 성취하고 있던 내내, 급진주의 자체는 결코 죽지 않았다. 급진주의의 4번째 현시(顯示)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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