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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사구부정과 네커티브 신학의 유사성

목적하는 바까지 끝없는 부정

 

사구부정은 무상, 무아에 대한 깨침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공함을 깨닫고, 이어,

열반적정에 이르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사구 부정은,

하나를 부정하고, 

그 부정을 부정하고,

1구와 2구를 부정하고,

3구를 다시 부정한다.

 

이 구도에서

우리는 매 부정구의 종결 순간마다,

부정을 통한 긍정에 대한 기대를 갖지만,

재차 부정으로 앞선 기대를 부순다;

기준 명제에 대한

1구 부정(A)으로 준거 존재 이외의 여타 존재 가운데 하나에 대한 기대는

2구 부정(B)으로 거부되고, 새로운 기대,

A도 아니고 B도 아닌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가 생겨난다.

이때, 3구 부정(C)으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4구 부정(D)이 행해진다. 그 결과는? 

 

이때, 기준 명제가 적절하게 취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2구 부정으로 청자는 현실 전체을 너머 '상상의 그밖'에 대한 기대가 생겨난다.

(여하튼 사고 구조는 구조물이라는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토대를 찾는 것은 필연이니까) 

그 어떤 새로운 토대(프라빤짜)를 찾았든, 3구 부정으로 명제 제기자는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찾아내는 최후의 궁극책,

의지, 충동, 아트만, 푸루샤, 크왈리아, 양자적 관계, 절대정신, 생각하는 나, bare attention, 등등은

마지막 4구로 부정된다. 

 

네거티브 신학

부정의 귀결로서 알 수 없는 신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그래서, 순수 영혼을 찾는 것처럼, 진정한 신을 확립코자 하는 시도로써,

저무는 부실한 형이상학을 저버렸지만, 여전히 형이상학의 토대를 버리지 않는 반면,

 

용수의 사구는, 빤야 자득을 노리고,

허상인 현실을 넘고, 본상 찾아 이르른 망상을 넘고,

이내, 궁핍한 의식의 쪼가리들 일체에 매달리는 것까지 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둘은 부정의 형식에서는 유사성이 있으나, 노리는 바가 전혀 다르다.

 

 

윤리적 토대 제공에서 유사성

 

네거티브 신학이 신에 대한 여하한 긍정적 언급도 삼가는 것의 귀결은

여하한 언명으로도 타인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강제를 삼가는 것이다.

여기에, 신비주의에 대해 참작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비주의가

'개체의 모든 행위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책임과 그 귀결에 따른 감당'

회피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지배 이념, 형이상학의 시작에 다름 아니다. 

 

주지하듯, 빤야에서 모름은 지시 불가능성 전제가 암시한  귀결이다: 

목하 수많은 조건들과 떠오른 바들에 응하는 수단, 선택, 과정의 복잡성, 그리고 

목적 성취도와 여타 부수적 귀결들은 선택한 행위의 예측 가능성들을 줄임은 물론,

암시된 귀결에 따른 조마조마하는 마음 또한 피할 수 없다.

고로, 빤야에서 윤리적 토대는 두 측면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말인즉, 바른 사유, 바른 언행, 바른 생계의 윤리적 기초는

항상 모름을 참조하는 조마조마하는 마음과 성실함으로서,

생각, 언행, 생계 선택에서 최선을 다함과

그에 따른 귀결, 과보를 전적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흔쾌히 목을 내어 칼을 받은 어느 선사처럼.

 

 

 

사족

 

지시불가능성으로 건너가려는 여타의 모든 시도들,

특히, 인간 이성으로 건널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들은

유사이래, 수없이 그 허망함이 입증되었음에도,

개체발생적 발달의 필수 단계로 반복되며, 계통발생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협곡을 참작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시적 은유 같은 부정적 사유들은

오늘날 발전된 도구들의 편의성과 유용성의 증가에 희미해졌다; 대신,

용수와 같은 합리성으로 합리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업들은 넘친다.

 

당연시된 생각, 사실, 이론, 체제, 제도, 관계 그 무엇이든,

한발 물러서 전제들을 살피고, 그것들의 적절함을 고려하는 여유,

그러는 가운데 그 전제들의 한없이 허약한, 그리고 기반없음에 대한 이해,

이로써 무상에 대한 이해만이

여하튼 생이 고임을 안 자들한테는

당연한 것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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