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사랑에 대한 합리적 생각들: 시작에는 둘이 있어야

Constructivist Foundation 2(1)

 

Ernst von Glasersfeld

 

 

할 수만 있다면, 가장 먼저, 프랑스 노래 하날 부를 것이다: ‘사랑의 기쁨은 잠깐이지만 그 고통은 평생을 간다.’ 이리하는 것은, 나 또한 로맨틱한(Romantic) 사랑과 그로 인한 내적, 외적 활기를 높이 존중한다는 바를, 출발점에서 밝히고 싶어서다. 그럼에도, 감정과 관련해 말한다 한들 새로운 건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합리적 기초와 관련해서만 말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측면은 숙고할만한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합리적 측면이 그 행위의 기초가 된다라든가, 사랑이란 것이 여기 내가 기술한 것만이라든가 하는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바다. 내가 단지 제시하고 싶은 이론은 이렇다: ‘사랑이란 현상도 합리적 관점에서 탐구할 수 있는 측면을 갖고 있으며, 이런 방식을 써서, 필시 가정(家庭)에서 중요하게 쓰일 결론들에 이를 수 있다.’

 

바라건데, 내 제목이 한 동안 당신을 머뭇거리게 했기를... 의도적으로 그런 까닭은, 내가 이해한 사랑은 당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어떤 것임을, 시작부터 분명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한 것처럼, 당신들 둘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당신이 당신의 생활 세계에서 당신 자신과 또 다른 한 사람을 의식적으로 골라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리 과정은 일정한 반성 수준, 즉 반성적 생각하기를 필요로 한다. 반복하자면, 나는 오직 합리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의 측면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엄마의 가슴 쪽으로 - 로봇처럼 - 자신있게 향하는 갓난아이는 사랑을 전혀 모른다. 후에, 사춘기에 이르러, 다른 이의 몸의 특정 부위들에 자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이것 또한 자체로는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일정 여건에서, 신체 접촉에 이어 개인적, 정서적 관계가 유발될 수도 있지만, 이는 의심없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일이 결단코 아니다.

 

사랑의 핵심 전제 조건으로 개념 형성이 필요한데, 나는 이것을 자기 자신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자율적 개인의 구성이라 부르고 싶다. 이 구성을 성취하는 데에는 상당한 작업이 요구된다. 생명, 삶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서, 그래서 일반 인간들의 믿음에서 보자면, 타자들은 주어져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란, 철학자들이 그들 용어로, 존재론적 전제(ontological precondition)라 부르는 것으로, 그와 같은 존재론적 전제들은 그 정당성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세계에 타자들이 있다는 점, 그들이 실재한다는 점은 이른바 하나의 사실이다. 당신이 그들을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 또는 그들은 어디서 생겨났는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과 같은지,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는 다른 질문이다.

 

내가 여기 쓰고 싶은 구성주의 생각하기 방식은 오로지 그러한 전통과 그 존재론적 전제들에서 벗어난 하나의 시도다. 해서, 원하는 것은, 서구 전통에서 논의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 가정, 관념, 원리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내가 경고할 수밖에 없는 바, 나의 설명들은 무시무시한 입장에 이르러, 쟁점들을 제기하는데, 학교 철학에 만족하면서 이를 뒤에 남겨두는 위험을 감수하기 싫은 이라면 이는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물론, 그토록 오랫동안 잘 기능했던 전통과 절연하는 것은, 잘 안내되는 경우, 분명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하는 대답은, 나한테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이기에 답하는 것으로, 간단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심리상담자 또는 심리치료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오늘날 실상이며, 그렇다면, 필시 생명, 삶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이러한 논의로 구성주의가 존재할 권리를 갖고 있음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여하튼 듣기를 바란다. 그런 연후에야 나의 가정들에 도전할 훨씬 더 나은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내가 기술하는 구성주의가 근본적이자 급진적인 것은, 우리 지식을 내적인 구성으로 설명하려 하지, 주어진 어떤 것, 알려지기 전 거기에 있는 어떤 것의 재현으로, 통상 하는 것처럼, 설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현 이론에 대한 거절은 기본에서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를 거절한 최초 사람이 내가 아님을 강조한다.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생겨난 시대에는 이해되지 않았기에, 또 한편으로는 확립된 철학적, 정치적 체제의 관념들과 들어맞지 않았기에, 서양 철학사의 가장자리에 남겨졌던 관념들에서, 내 반대는 생겨났다.

 

일종의 인식론적 스캐빈져(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처럼 널려 있는 파편들을 주워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이어맞추려 했다. 이들 파편들의 기원의 역사는 적어도 25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거기에는 구성에 필요한 많은 블럭들이 있다.

 

나는 조지아 대학에서 이러한 구성주의의 역사를 명확히 다루는 강좌를 12년 동안 진행했다. 강좌는 매학기 14주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나한테는 언제나 너무 부족했다. 여기서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납득될만한 단지 짤막한 발췌만을 내놓는다.

 

문서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관련된 역사는 기원전 5, 6세기의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은,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예기치 않게 발견할, 그 시절에도 상당히 발전했던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활동했다.

 

단어 테크놀러지를 쓴 것은, 그들이 그 시대에, 강에 댐을 만들고 청동을 주조할 수 있었다는; 훌륭한 도자기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는; 약물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는; 생물학과 화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그리고 천문학에서 이집트인들의 지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 철학자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인물들과, 하나 이상의 분야에서 탁월했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는 점 또한 추가해야 한다. 그들은 작가, 미술가, 음악가, 과학자, 그리고 의사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그들 지식을 통합하려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 모든 지식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 사람들은 특히 실용적이어서, 지식의 문제에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즉, 관찰하기를 써서,달라붙었다. 그들이 본 것은, 이를테면, 소리(noise)에 겁먹는 동물,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라는 새, 뜨거운 스토브에 닿으면 움찔하는 아이였다. 이것들은 경험 데이터(資料)로 이로부터 그들은 지식 이론을 발달시켰다.

 

정말, 이런 방식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모든 아이들이 이와 똑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당신이 이런 방식으로 시작할 경우, 이어 바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 감각기관들을 거쳐오는 메시지들을 받으며, 그것들이 우리한테 보여주는 것은 세상을 닮은 어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메시지를 '정보'라 부른다: 정보는 외부 세계에서 머리, 두뇌, 영혼, 또는 생각하기의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간단하기에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건강한, 즉, 소박한, 누구나 아는 지식을 만족시키며 쉬이 논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맥락의 생각을 따르다 보면, 조만간,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당신은 사실상 마지막까지 풀 수 없는 역설 신세를 지게 된다. 소크라테스 이전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그때 이미 이런 황당한 결론에 이르렀다.

 

역설은 아래 이어지는 숙고에서 생겨난다. 당신 자신 내부의 세상의 이미지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 이미지의 정확성 여부, 그것이 외부 세계와 일치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당신은 내부 이미지를 외부 세계와 비교해야만 하지만, 외부 세계는 오직 당신의 감각기관들을 거쳐서만 이를 수 있기에, 그러한 비교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분명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당신이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 그리고 지각한 것을 분절 혹은 표현하는 방식의 결과일 것이다. 아일랜드 철학자 조지 버클리가 이 점을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우리는 오로지 관념과 관념만을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할 때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세상에 속한다는 이미지가 "참(true)" 이미지임을 주장하고 싶은 경우가 물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은 2500년 이상의 서양 철학사에 상존하며 추진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 사상가, 작가, 예술가들이 이 논리적 불가능성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초지일관 노력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늦게나마 깨달아,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성공한 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우리 용어로 알고 표현하기 전, 우리 지식이란 걸 그 세상 있는 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 이때, "참"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 이래, 회의론자들은 그와 같은 진리(truth)가 입증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 이미지와 그것의 원본이라 가정된 것과 비교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이는 정확히 불가능하다는 논의를 끈질기게 반복해 오고 있다.

 

보다 최근의 철학사에서 영국 경험론자들, 로크, 버클리, 그리고 흄은 그 외부 세계의 지각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로크는 이차 특징들, 즉 감관(감각 기관들을 거친) 지각들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버클리는 정확히 같은 논의들을 마찬가지로 일차 특징들에 적용했고, 데카르트가 그러한 세계에 귀속시켰던 그 특징들도 똑같이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어 흄에 이르러, 우리가 관계, 즉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모든 연결로 이해한 모든 것들은 심적 과정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로지 생각하는 존재만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그의 통찰력이 담긴 회의론적 생각하기 방식을 지지했다. 이것이 명백히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우리 경험 세계에서 사물들을 서로서로 '우리'가 관계짓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이 (경험 밖) 실재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 그리고 또한 관계 여부 마저 우리는 결단코 말할 수 없다.

 

이것을 증명하는 데 쓰일 수 있는 간단한 예를 하나 든다. 당신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전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고 하자. 그때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더 큰지 아닌지 알려면 당신은 일정한 조작들을 행해야 한다. 적어도, 한 그루 꼭대기를 마음에 그린 다음 이어 당신의 '주의(attention)'를 움직여 다른 그루 꼭대기에 이르러야 한다.

 

당신은 당신 주의가 움직인 선을 고려하고 그 선이 아래로 또는 위로 움직였는가를 확인한 연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려다 보았기에 오른쪽 전나무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 주의를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시키는 행위만으로 두 나무 사이 관계를 창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지각한 대로 나타나지만, 그것을 생성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조작들이다.

 

여러분도 필시 알고 있는 것으로, 칸트는 당시에 흄의 관념들이 자신을 자신의 독단적 미몽에서 깨어나도록 했다고 말했다. 칸트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서 공간과 시간은 그와 같은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 장치임을 증명함으로써 실재론적 세계관 밑에 깔린 깔판을 잡아빼 버렸다. 공간과 시간이 우리 경험의 특징인 것은 카메라의 광학적 특징이 찍히고 있는 풍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렌즈에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전문적이며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우리 삶을 사는 방법에 엄청난 귀결들을 지니고 있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사물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 경험 속으로 옮겨 온다는 작업 가설을 당신이 받아들일 경우, 그때 바로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기 이전 그 자체 세계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들, 모든 이미지들은 구조들로서, 공간과 시간에서 형성된 관계들의 골조 없이는 구성, 유지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개념들이 없는 그 세계는, 상상될 수 없으며 변함없이 시인과 예술가들을 동(動)하게 하는 신비주의자들의 "聖體(sacred unity)"로 남겨지지만, 모든 합리적 용어들과 해석들은 그저 그 세계를 미끄러져 통과한 것이기에,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이러한 견해는 칸트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개개인들이 주장했던 바다. 그럼에도, 철학사에서 조그만 측선으로만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러는 내내 주류는 자신의 전통방침에 따른 회피 시도를 계속했다. 그것은 항상 에두른 탈출로를 써서 지식의 역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1900년 이래, 상황은 철저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물리학에서 격변과 양자역학의 출현은 과학에서 '세계는 객관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는 착각을 제거했다. 혁명적 언명들로는, 하이젠베르크의 구절, "과학자가 더 깊이 바라볼수록,자신을 더 많이 보게 된다"(하이젠베르크 1955, p. 17)나, '물리적 대상 개념은 인간 마음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다'(아인쉬타인 1954, p.291)라는 아인쉬타인의 설명이 있다.

 

물론, 지식 이론에 관한 이러한 상세한 입문이 우리 이야기 주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일견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이 주제에 작은 의미라도 부여하려면, 다음 견해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합리적 지식을 문제삼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지식을 우리 경험 세계에서 구성해야 하기에,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이를 할 수는 없기에, 우리 모두는 불가피하게 혼자다.

 

많은 이들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언어 소통을 거쳐서, 또는 영상들을 통해 알고 믿는 많은 것들을 배우기에, 이는 참이 아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이를 논박하기 위해, 나는 당장 이론적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최근 수 십년 사이, 구성론적 견해(이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경험 세계를 생성시킨다)는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에 따라 쾌나 강해졌다. 한편에서는, 하인츠 폰 푀르스터와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신경생리학적, 생물학적 작업들이 구성론에 과학적 발판을 만들어 주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클로드 쉐넌과 노베르트 위너가 정식화시킨 통신이론이 최초로 언어적 소통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통신이론이 밝혀준 것은, 가르치기, 심리치료, 그리고 사회 일반에서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이었다.

 

언어는, 일상에서, '그 사람한테서 저 사람으로 생각, 관념, 지식, 그리고 감정들 전달하기'라는 착각을 만들어낸다.그 사람이 말하거나 쓰면, 저 사람은 듣거나 읽으며,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이 어찌 생각하고 느끼는지 통찰력을 얻는다. 그럼에도, 이것은 착각이다. 이를 분명히 보고자 한다면, 말을 주고받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무언가 말을 하면 나는 소음(noise)을 만들어내고, 쓰는 경우라면 시각적 기호들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이 내 언어에 익숙한 것들이므로, 이 소리나 기호를 듣거나 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단어로 알아본다.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그들은 이들 단어들에 의미들, 즉 대상, 상황, 과정 경험과 느낌들을 귀속시킨다. 이것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들었던 자신들의 연상(連想)들이다. 모든 이들이 그들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 의미들을 창조하지만, 그것들은 사람 마다마다 가지각색이다.

 

이로써 내가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내 단어들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이들 것인 의미와 개념들을 그들 안에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장 평범한 것에 관해, 사과, 나무, 연필, 또는 교통 규칙에 관해 말할 때조차, 이들 단어들에 우리가 연계시키는 관념들은 모두한테 같은 것들이 아니다. 물론, 그 차이들이 일상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 의미가 다른 이들의 의미와 주목할 정도로 차이를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 부합하도록, 우리의 주관적 의미들이 수많은 교환들을 거치면서 닳고 닳아버려서 그렇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찰없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사실이 그것들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이 좀 흔하지 않은 문제들, 이를테면, 철학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해당 용어들에 대한 개인적 차이들은 아주 급속히 드러나게 된다.

 

이런 일을 우리 모두는 꽤나 빈번하게 겪고 있음에도, 언어가 운송 수단이라는 착각은 지속된다. 말한 것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한 경우 당신은 더 큰 소리로 말한다. 많은 교사들이 이러는 걸 당신도 보고 알고 있다: 뉘른베르크 깔대기가 그럴싸한 가르치기 방법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을. 게다가, 마치 프린터 잉크 자국 밑에서 감춰진 단어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책을 읽는 학생들 또한 보고 알고 있다.

 

소통에 대한 사이버네틱스 이론이 오늘날 명백히 입증한 바, 직접적 구두(口頭) 전달이라는 관념은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전송, 송신자, 수신자란, 당신이 언어학 용어들의 개념 내용을 다룰 때, 오해를 야기시키는 은유들이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이한테로 움직이는 것은 소리, 그래픽 이미지, 그리고 전신(電信)에서는 전기적 충격이다: 이런 것들은 소리, 빛, 전기의 짧은 진동 패턴이다. 이들 패턴들은 재인(再認)될 수 있고, 기호에 어의(語意)를 연결시킨 코드를 알고 있는 경우, 의미 있는 기호들로 해독될 수 있다. 그리고 기호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연결은 오로지 모든 개개인이 언어를 경험하며 창조해야 했던 연상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단어의 의미들은 주관적이며,빈번하게 쓰여 서로서로 닳고 갈아져 근접해지게 되는 일상 영역에서조차, 변함없이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 화제에 중요한 사이버네틱스의 두번째 요소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라는 관념이다. 우리 감관(感官)들이 - 신의 개입 덕택에 - 그러한 논리적 모순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그렇게 그 세계의 정확한 이미지를 우리한테 부여하고 있다는 신비적 믿음을, 우리가, 데카르트와는 달리, 공유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게 구성 유지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모델을 고안해야 한다.

 

그 방식을 삐아제보다 더 잘 요약한 사람은 없었다. 사이버네틱스가 발명되기 전 1930년대에 이미 그는 그의 책, La construction du réel chez l’enfant 에서 "마음은 그 자신을 조직함으로써 세계를 조직한다"(Piaget 1937, p.311)고 썼다.

 

나는 이제 이러한 구성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간략히 보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가설들이지 사실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신의 수없이 반복된 경험들에 아주 잘 들어맞는 가설들이다. 우선, 젖먹이는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 차이를 모른다. 이 구별은 발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여기서 해보고 이어 다음 번에는 저기서 해보면서, 점차 경계가 형성된다. 내부에 있는 것이 내가 되고, 외부에 있는 것은 세계가 된다. 한 살쯤, 아이는 거기까지 생각은 못하지만, 사물들을 그에 맞게 적절히 다루는 것을 배운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순환적 반응(circular reaction)"으로 가리켰던 것들에 대한 삐아제의 관찰들이다. 코드를 잡아당기는 조그만 손은 나한테 속한다. 나의 잡아당김으로 울고 있는 벨은 밖에 있다. 이런 그리고 많은 유사한 행위들로,피조물 - 후에 자아라 불린다 - 은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동시에, 아이는 자신의 일부가 아닌 사물들에서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 즐겁다는 걸 배운다. 자기 엄지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너무 세게 물 경우, 아프다, 그래서 그것들은 자신한테 속한다; 담요 끝자락이나 곰 인형의 귀 또는 그녀 입 안에 집어넣는 그 어떤 것들하고는 다른 것들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타자"라는 관념, 그리고 후에 사회라는 개념이 일련의 길고 긴 경험들에 기반해서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무수한 관찰들에서 이끌어낸 결론은, '최초, 조그만 아이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였다. 구름과 달이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것은, 당신 자신이 집에서 정원으로 달려나오는 것과 같이, 뭔가 의도가 담긴 것이다. 나무가 그 커다란 가지를 움직이는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팔을 들어올리는 것 못지 않은 의식적 양식(意識的 樣式)이다. 그렇지만, 마침내 당신은 그 차이를 구별하는 걸 배우게 된다. 잡고 싶은 개구리 앞에서 접근할 경우 보고 있는 것 같기에, 그리고 소리를 내는 경우 물로 뛰어들기에 당신은 알아차림(自覺)이 개구리한테 귀속된다는 것을 배운다. 당신은 또한 집에 있는 개나 고양이한테도 일정 의도들을 귀속시킨다;가족 인간 구성원들의 행동을 보고, 당신은 마침내, 그들이 가끔씩은 체계적으로 행동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어 타자들의 목표는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그 방법들을 찾아내려는 가없는 과제에 착수한다.

 

칸트는 이를 그의 순수이성비판 첫 판본에서 요약했다: "내가 또 다른 주체를 상상하고 싶을 경우, 나는 나를 주체 자신으로 만들었던 어떤 것이든 그저 이 타자한테 귀속시키는 것만으로 이를 할 수 있다." (Kant 1781, A353) 이는 자발적 움직임과 자각으로 시작해서, 이어 결단, 의도, 계획들에 이르고, 마침내, 타자들이 그들 자신의 목표들을 추구하는지 아닌지를 자기 자신 추구하려는 방식들을 써서 연역(演繹)하려는 시도로 끝맺는다. 실상이 그런 것 같으면 하시라도, 즉, 그런 결론이 정당화되고 있다고 느낄 때, 타자들이 가정된 그들 목표를 당신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당신은 그러한 바를 다음과 같은 사실의 확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세계는 당신이 자신의 경험들로 창조했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는 내가 주장했던 구성주의 이론에 극도로 중요한 점이다. 이것을 토대로 허용되는 주장; '내 지식은 그것이 구성되었던 개별적 경험 세계보다 훨씬 더 넓은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타자가 내 지식을 습득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그렇기에,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내 경험적 현실의 안정성에 중대한 기여를 하며, 한발 더 나아가, 윤리학 분야에 새롭고 중요한 조망을 개척하고 있다.

 

단어 윤리는 물론 다양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윤리의 의미가 우리가 해야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규정한 일단의 규칙들이라면, 그럴 경우 구성주의는 다른 모든 합리적 철학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것이 된다. 하지만, 윤리를 우리 행동 규칙들의 기초가 되는 가치들의 토대를 뜻하는 것으로 취할 경우, 상호주관적 현실에 대한 추구로 우리는 여타 사유 방식들과는 다른 기초를 얻는다.

 

이제까지 철학은 항상, '타자들의 운명을 고려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필수적이다'는 가정을 당연시하며 시작해야 했지만, 이러한 가정을 결코 합리적으로 정당화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구성주의 관점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있어야만 혼자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내 경험 세계에 더 확고한 기초를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상호주관성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는 윤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내 현실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도록 하는 전적으로 인식론적 논의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몇몇 중요한 원리들이 도출될 수 있다. 한편으로, 칸트의 "정언 명법이 있다: 이에 따라, 타자들은 끝까지 수단이 아닌 자율적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타자들이 내 견해나 방법들에 동의하도록 밀어부쳐질 경우, 내 현실은 더 이상 결코 안정적일 수 없게 된다는 깨달음을 끌어낸다; 동의가 자발적이지 않다면,그것은 내 세계관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타자들이 내가 하려 한 바를 하는 것을 볼 때에야, 그들한테서 내 자신의 원리들의 확증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명백히, 동의는 강제되거나 구매될 수 없는 것이라는, 하지만 납득(納得)에 의해서만 자라나야만 한다는 관용(寬容)과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제서야 마침내 함께 살기라는 주제에 이르렀다. 그래서, 구성주의가 적절함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랑의 실제적이며 합리적인 측면에 이르렀다.

 

제목에서 분명히 했듯이, 그 시작에는 둘이 필요하다. 물론, 바다나 산, 또는 콜리플라워나 쵸콜렛 또한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한테 중요한 것은,만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점을 할 수 있는 한 자주 자신한테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내가 뜻하려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존재로서 창조하고 그들한테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들을 경험하는 방식은 우리한테서 나온 것이지 그들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한테 귀속시킨 특징, 감정, 그리고 의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습관적 추상들에 종종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세계관을 적어도 몇몇 측면에서나마 확증하려면 다른 사람이 필요하기에, 그게 자발적이지 않을 경우 그런 확증은 쓸모가 없기에, 동반자한테 자율, 생각의 자유, 행위의 자유를 부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또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그 또는 그녀>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인정하자마자 분명해지는 것으로, 이는 함께 사는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과 그가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같아야 할 것이다. 실제, 이것은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가끔씩은 아주 잘 통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자신을 끼워넣어 다루는 일은, 이를테면, 새 차를 처음 몇 백 킬로를 길들이는 때와 꼭 같다. 거칠고 날선 데를 서로서로 갈아가는 까닭은, 말하자면, 합리주의자한테는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정서적 이유들로, 다른 이가 무엇을 하든, 그 또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자신한테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항이다.) 이윽고, 가끔씩 기질들이 너무 맞지 않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방식으로 행하는 다른 한쪽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경우, 처음에는 기꺼이 했던 양보로 이룬 타협이 갑자기 희생으로 돌변하기에,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된다.타자를 위해 이전에는 기꺼이 했던 일들이 이제는 강제된 노동으로 여겨지게 된다. 관계를 지속시켜야 할 경우, 보존 유지되어야 하는 '임계(臨界) 균형'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마치 '한쪽의 바람이 언제나 두 사람 모두의 바람이 되도록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자율적인 두 개인들을 다루는 경우, 실리에 입각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함께 사는 예술은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하는 문제는, 당신이 타자를, 가장 깊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하게끔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사랑은 분명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 모두한테 서로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일이 항상 있음을 볼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치료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걸 관찰할 많은 기회를 가졌던 한 명의 주변인으로서, 나는 사랑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널리 퍼진 착각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은 밖에서 다가온 마법처럼 생겨나 사랑을 낳고 영원히 그 사랑을 유지시킨다는 걸 믿도록 아이들을 키우는 한, 그런 경우 그런 사랑은 기능할 수 없다. 오비디우스가 오래 전 지적했던 바, 사랑은 예술이다. 사랑은 계속 창조되어야 하며, 끈기 있는 거리두기(警戒), 보살핌, 사려깊음을 요구한다.

 

이것은 구성주의 관점에서는 매우 분명하다. 동반자란 언제나 그 또는 그녀에 대해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그 또는 그녀를 추상했고, 그러므로 그 또는 그녀는 우리 구성물이지,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이를테면, 물-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구성했고, 우리가 지난 일에 신뢰를 주는, 그리고 우리한테 기대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 인물이다. 이들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실망하며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 또는 그가 행하고 말하는 방식은 언제나 다양하게 다른 방식들로 해석될 수 있기에, 동반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우리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 망각된다.

 

그토록 자주 조화(調和)를 깨뜨리는 것은, 어떤 해석이 유일하게 맞는 것인 양 그 해석을 강요하는 것이다. 구성론자한테, 정확한 것들은 오로지 인간이 발명한 수학이나 여타 게임들에서만 존재한다. 단 하나의 해법만이 있다고 말하는 이의 삶에는 여하한 문제도 있을 수 없다. 단 하나의 해법만을 볼 수 있는 그러한 경우들에서조차, 다른 해법들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낫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동하는 해법을 찾는 것이고, 그것은 가끔씩만, 문제 상황이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음이 발견될 때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신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과 함께 살 때 그 또는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무수한 방식들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이성(理性)은 더 나은 생존 기회를 확보하는 사랑의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주(註) 

영어로 출판되기는 최초로, 
린츠에서 1989년 오스트리아 협회 제 3차 심포지엄에서 행해진 
대담의 개정판이다. 

참조 

Heisenberg, W. (1955) Das Naturbild der heutigen Physik. Rowohlt: Hamburg. 
English translation: Heisenberg, W. (1958) The physicist’s conception of 
nature . Harcourt Brace: New York. 


Einstein, A. (1954) Physics and reality. Bonanza Books: New York. 


Piaget, J. (1937) La construction du réel chez l’enfant. Delachaux et Niestlé: Neuchâtel. 
English translation: Piaget, J. (1954) The construction of reality in the child. Ballantine: 
New York. 


Kant, I. (1781) Kritik der reinen Vernunft (First edition). Available at: http:// 
www.gutenberg.org/etext/6342. English translation: The Critique of Pure Reason 
(translated by N. Kemp-Smith). Available at: http://humanum.arts.cuhk.edu.hk/ 
Philosophy/Kant/cpr 

Received: 22 October 2006 
Accepted: 10 November 2006 


저자에 관해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는 1917년 뮌헨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인 부모 밑에서, 북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자랐다. 
쮜리히와 비엔나에서 수학을 간략하게 공부했고, 
2차 대전 중에는 아일랜드에서 농부로 살아남았다. 
1946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61년까지 케카토의 스쿠올라 오퍼러티바 이탈리아나에서 
(언어분석과 기계번역을) 함께 연구했다. 
1962년부터 미국이 지원하는 컴퓨터 언어학 연구 프로젝트 감독관이었고, 
1970년부터는 미국 조지아 대학에서 인지 심리학을 가르쳤고, 
1987년부터 명예 교수가 되었다. 
2006년 현재 매사츄세츠 대학, 과학적 추리 연구소의 공동연구원 
1997년 클라겐푸르트 대학 명예철학박사. 

1960년 이래 260개 이상 논문 발표, 
책들로, 
Wissen, Sprache und Wirklichkeit 1987. Linguaggio 
e comunicazione nel costruttivismo 
radicale, 1989. 급진적 구성주의: 알기와 
배우기의 한 방식, 1995 (translated 
to German Portuguese, 한국어, and 
Italian) Grenzen des Begreifens, 1996. Wege 
des Wissens, 1997. Wie wir uns erfinden 
(with Heinz von Foerster), 1999 (Italian 
translation 2001). – Homepage: 
http://www.vonglasersfeld.com 

2010년 11월 12일, 
1970년대 RC로 알려진 인식론을 정식화한 인물이 영면에 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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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2011, 2, 16 , 수정 2013, 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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