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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들을 통한 확증(Corroboration by Others)

        타자들을 통한 확증 

 

물정(物情)을 알고 갖춘 이러한 수준에 이르면, 이들 ‘타자들’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그리고 제어하려는 데 엄청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경험장(經驗場)에, 계속해서, 타자 모델들, <움직이고, 지각하고, 계획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철학적 사색까지 하는 타자들, 그 자신이 경험에서 스스로 추상했던 개념, 스킴, 그리고 규칙들과 같은 종류들을 귀속시킨 타자들>에 대한 모델들이 거주토록 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들 모델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당수 지식은 우리 자신이 자신들의 경험을 다루면서 찾아냈던 바이어블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들 타자들 가운데 특정 인물이 특정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측할 때, 그 예측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한테 귀속시켰던 특정 지식 조각이다. 만약, 그때, 그 타자가 우리 예측대로 행한다면, 그 지식 조각은 우리 자신의 행위 구역에서 뿐만 아니라 그 타자의 행위 구역에서도 바이어블한 것으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그 타자가 지니고 그에 맞게 행하는 것으로 우리가 전제(當然視)했던 지식과 추리에는 2차 바이어빌러티가 부여된다. 

 

    이러한 종류의 확증(確證)에 대한 가치 평가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개체의 그밖에 구성하기 에이전트들에 대한 구성이 우리가 우리 경험 세계에 갖추는 물리적 대상들의 구성보다도 더욱 자유롭지 <즉, 맘(意志)대로 되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타자들 구성은, 계속해서 훼방 받으며, 그렇기에, 방향 잡혀지지만, 그렇다고, 제약들로 기능하는 장애들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명백한 것은, 우리가 개체로서 우리 경험장 너머 타자들의 경험장으로 뻗어가고 있는 것으로서, 상당한 정당성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2차 바이어빌러티는, 우리 경험적 실재의 안정화와 견고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2차 바이어빌러티의 도움으로 창조되는 상호주관적 수준에서는, 타자들이 개념, 행위-스킴, 목표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느낌과 감정(情緖)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고로, 오로지 홀로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실재하는(진짜인) 것들로 믿게 된다. 그러한 수준에서, 우리는 ‘사회’,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상식’에 대한 ‘확증된 사실들’에 대해 말하면서 정당화시켰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호주관적-실재(社會的-現實) 발달에 대한 윤곽은, 알렉산더 보그다노프가 1909년 출판한 네 개의 대담들 말미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오늘날 사이버네틱스의 선구자로 인정된 이 사상가는 실로 박식하며 만능이었다. 그는 의사, 실험 생물학자, 그리고 사회학과 과학철학자로 일했다. 그는 그의 친구 레닌과 격렬히 논쟁했다; 레닌은 그의 철학을 유죄로 공표했지만 그의 작업은 계속하도록 했다. 1928년 그가 자신에게 직접 시행했던 의학 실험으로 죽자, 곧바로 스탈린은 보그다노프의 책을 금서로 지정했으며 그는 사실상 거의 잊혀졌다. 몇 해 전, 러시아 동료인 블라디미르 사도프스키는 그가 학생 시절 이래 숨겨 보관했던 책에서 그 대담들을 나한테 복사해 주며 말했다: ‘우리한테도, 구성론자가 있었다네’.

 

    그것들을 나는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최종적으로 번역해냈을 때, 아주 놀라웠으며 희열을 느꼈다. 그 대담들은 구성론의 도구론적 측면에 대한 감탄스러운 간결 명쾌한 제시이자, 거기에는 상호주관적 실재 발생에 제공되는 분명히 사회적인 성분이 하나 있다. 

 

    지식은, 보그다노프 말하길, 공구(道具)로 기능한다. 그 공구가 얼마나 우수한지, 또한 얼마나 개선될 수 있는 지는, 일단의 사람들이 같은 일을 공동으로 할 때, 판명된다. 더 개선될 수 있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그 공구는 ‘진리’로 불릴 것이다 (Bogdanov, 1909, pp.30–3). 

        

    우리의 경험적 진리와 실재(現實)의 이러한 사회적 구성에는 아직도 탐구되어야 할 많은 사항들이 있겠지만, 공동작업 개념과 목표 달성을 위해 협조하는 노력들은 필시 가장 강력한 원리일 것이다.** 그밖에 다른 단면들은 사회학자와 사회심리학자들의 작업들에서 구별해낸 통찰력들로 엮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 그리고 이것은 구성론자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 공구들이 발명되거나 개선될 때, 보그다노프 덧붙이길:

 
** 피에트로 바르베타(Pietro Barbetta)는, 최근, 내가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던 작품인 삐아제의 Études sociologiques에 대한 그의 이탈리아어 번역판을 내게 보냈다. 거기서 나는 삐아제가 지식의 사회적 구성을 이와 똑같은 식으로 접근했음을 발견했다. 다행히도, 레슬리 스미스는 이들 삐아제의 중요한 에세이들의 출판을 현재 진행하고 있다. 

   

 

천재든 단순 노동자든, 그들 각각의 인지적 그리고 실용적 창조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로서 인간 존재다. (Bogdanov, 1909, p.33)

 

    달리 말해,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여하한 분석도, 바이어블한 개념과 스킴들을 구성하는 마음은 그 어떤 경우에도 개체로서 마음이라는 점을 전적으로 고려치 않는다면, 성공적일 수 없다. 고로, ‘타자들’과 ‘사회’, 또한, 개체들 각자의 주관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 각자가 구성한 개념들이다.

 

    ‘타자들을 통한 확증’라고 내가 불렀던 것으로 돌아가, 그러한 확증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거쳐 더 쉽게 그리고 훨씬 더 자주 성취된다고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 전제(當然視)지만, 우리 모두는 그 전제가 반박당하는 상황들에 처해진 경우들을 아주 자주 발견한다. 타자들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한테 말하거나 보여주는 것에 대해, 상호교환이 진행될수록, 이것은 그것일 수가 없다고, 그들이 우리한테 말할 수도 (우리 역시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그들이 쓰는 단어들이 우리 것과 같지만, 그들 마음에 있다고 생각되는 개념들의 네트워크는 우리가 구축(構築)했던 것과는 양립하지 않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개체적 사건이며, 나는 이를 7장에서 다시 거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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