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알아보기 또는 재인(recognition)

알아보기(再認)

 

기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알아보기는 재연하기와 유사하다. 이 둘은 자주 긴밀히 협력하며 작동하는데, 이를테면, 폭스바겐 뒷부분만 보지만 그럼에도 그 차 전체의 특징적 모양을 시각화할 수 있는 식으로 그 차를 알아볼 때 그렇다. 하지만, 지각 장에서 부분적 제시로 사물을 알아보는 그러한 능력에, 반드시, 그 사물을 자발적으로 재연하는 능력이 함께 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 이를 알아차릴 계기를 가진 바 있다. 우리 경험 세계에는, 알아볼 수는 있지만, 시각화하려 할 때는 이용 불가능한 아이템(項)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얼굴을 보며 만났을 때는 면식 있는 이들로 알아보지만, 그들이 우리 시각장에 없을 때 그들을 묘사하고자 할 경우, 적절한 외모 이미지를 불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발달 과정에서, 알아보기가 경험 아이템을 자발적으로 재연하는 능력보다 앞선다는 것은, 많은 영역들에서 관찰된 사실이다. 이것은 언어학자들이 ‘능동적’ 그리고 ‘수동적’ 어휘라고 부르는 것들 사이 차이로 문자화되어 잘 알려져 있다. 이 차이는 이차 언어 학습자한테는 쉬이 보이는 것이지만, 일차 언어에서도 알아차릴 수는 있다: 듣거나 읽을 때는 아는 정말 많은 단어들을, 말하거나 쓰려 할 때는 쓸 수 없다. 

 

이러한 발달 지체가 암시하는 것은, 지각 아이템이 없음에도 그것을 자신한테 재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보는 개념 구조 말고도 필요한 게 더 있다는 거다. 삐아제가 항상 주장했던 바, 상상하기와 재연하기의 모든 형식들은, 실상, 내재화된 흉내(模倣)다 (Piaget, 1945).**

 

**  삐아제가, 지식은 외적 실재의 복사나 그림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진술했음을 명심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고로, 그에게, ‘모방’은 주체의 경험 장 외부 대상에 대한 복제 산출이 아니라, 외재화(外在化)된 경험의 재–생성을 의미한다.

 

한편, 당장 보이는 소재에서 구성했던 것 (‘복사하기’라 내가 부를) 모방하기와 그것을 기억에서 꺼내 모방하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 실물을 그리는 것보다 그것을 상기(想起)해서 그리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 같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지도(地圖)는 이런 추가된 곤란을 말끔하게 하는 데 유익한 은유들이다.

 

 

 

언어적 상호작용

    의미론적 기초에서,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447

 

1. ‘개념’과 ‘재인 패턴’ 사이 구별은 발달적이자 기능적이다. 그 재인 패턴은 앞서 형성된 것으로 특정 행위가 구체적 지각물과 함께 정렬, 발동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자극–반응 메커니즘과 같은 행동(行態)주의 개념으로 적절히 묘사, 기술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길을 건너며 연석 너머 차도로 한 발 디딜 때, 앞서 발걸음보다 발을 높이 들어올린다. 연석을 개념적으로 알아차릴 필요 없이, 지각 시스템은 감각 패턴을 알아보고 과거 ‘바이어블’한 것으로 입증된 운동 프로그램을 촉발시킨다. 삐아제 용어로, 그 시퀀스(配列)는 ‘연석 통과하기 스킴’이다. 우리 일상의 수많은 행위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하며 여하한 개념적 수반도 요청하지 않는다 – 그렇다고, 이로써 행동주의의 전제(當然視), <개념들은 실존하지 않는다>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재인 패턴이 개념과 병합되는 경우는, <그 자신을 특정(特定)하는 감각 신호들 없이 그리고 행위 촉발하기 없이>, 자발적으로 또는 단어로 인해 불려나올 때다.

 

2. ‘소리–이미지’와 ‘재인 패턴’ 사이 구별은 유추적이다. 구체적 청각 신호들을 특정 언어의 단어로 알아보도록 하는 재인 패턴은, 그 단어를 발화(發話)로 산출하도록 하는 소리–이미지의 재현(再現)보다 앞서 형성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는 언어학자들이 구별하는 능동적 어휘와 수동적 어휘의 차이로 파악된다. 도식의 오른쪽 배치가 왼쪽의 거울 이미지인 것은, 훈련이나 관행(習慣)에서 생겨나 명령 권능의 기저를 이루는 자극–반응 경로가 한 번 더 있기 때문이다. 양쪽 경로의 요소들 사이 여하한 차이도 없는 것은, 오른쪽에서, 촉발자가 (언어학으로 특정된 소리인) 음소(音素)들에 대한 청각 경험이라는 사실이 문제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경험과 연결되었던 반응으로서 특정 행위는, 음소들뿐만 아니라, 사전에 훈련되었다면, 몸짓, 빛 신호, 또는 깃발로도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들

  사물과 단위들에서,

http://www.cysys.pe.kr/zbxe/RRC/324509

 

카라무엘한테, 그것(數-構成)은 ‘의도적으로 [상이한 사물들]을 생각으로 통일시키는 일’이었다. 그 후 30년쯤 지나, 버클리가 자신한테 남긴 메모 하나: ‘수가 마음 없이는 그 무엇에도 없다는 것은, 사물들이라는 복합 관념들을 만드는 것은 바로 사물들을 하나로 간주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1706–8, par 106). 그럼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남아 있다: <‘사물들’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또는, 보다 정확히 <마음이, 사물들을 단일화시켜 복합 관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구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맥렐란과 듀이는 그 필수(必要) 조작들을 명시할 모든 생각(計劃)을 갖고 있었다.

 

단순한 알아보기(再認), 예를 들어, 세 사물들을 셋으로 알아보기에 수반되는 지적 조작들은 다음과 같다: 세 대상들이 전체나 그룹(群)과 연결된 하나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아보는 것 – 말인즉, 세 사물들을 반드시 개체(個體)들로 알아보아야 하며, 동시에, 세 사물들로 형성된 하나, 단일성, 전체(全部)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McLellan and Dewey, 1908; p.24)

 

그들은 여기서 단어 ‘알아보기(再認)’을 사용했다 – <하나이거나 셋인 것은 사물들에 속하는 일종의 지각 가능한 속성이다>를 함의하는 것으로 썼다 – 하지만, 그 구절 조금 앞에서 그들이 지적했던 것은, ‘수는 합리적 과정이지 감지[sense: P.33을 보라] 사실이 아니다’(ibid., p.23)였다; 그리고 그 구절 조금 뒤에 그들이 설명한 것은, ‘수는, 감지 지각의 소재를 정돈하고, 정의하는, 그리고 관계-짓는 합리적 과정들에서 생겨난다’ (loc. cit., p.35)였다. 이와 같이, 수 구성에는 구별된 사물들을 취해 특정 조작들을 써서 그것들을 통일시키는 능동적 마음이 필요하다. 수 개념에 대한 조작적 모델을 우리가 갖고자 할 경우, 분석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정의하기와 관계-짓기>라는 이러한 조작들이다.

 

 

 

 

 

 

상징들

   상징의 권능에서,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430

 

단어에 대한 의미론적 차원의 상세 모델은 7장에서 제시할 것이다. 단어 사용에서 재인과 재연의 역할을 논하기 위해, 여기서는, 간단하지만 불가결한 조건 두 가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첫째, 발화시 단어 조성 음소들 또는 작문시 단어 조성 그래픽 표식들은 반드시 자신의 어휘들 가운데 해당 구체적 아이템(項)들로 재인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재인 능력은, 발달 과정에서, 단어를 자발적으로 재연하는 그리고 생산하는 능력에 앞선다.

 

 

  알아차림에 대한 의문에서,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353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의식적, 개념화된 지식이, 발달 면에서, 그 상황에서 행위(處身) 방식으로서 지식에 뒤쳐진다는 사실은, 감각운동 수준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는, 내 보기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주어진 아이템(項)의 재인 능력과 관련해서 그 아이템을 재연하는 능력의 시간적 지체와 유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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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는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 진전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앞선 절들에서, 재연은 재인에 뒤따른다는 사실을 논했고, 상징들의 ‘가리키기’ 기능은 실험관찰적 추상들에 기초한 재연들을 야기하는 상징들의 권능에 익숙해진 결과로 따라온다는 사실을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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