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상호작용(interaction)

1. 

 

이러한 조정 맥락에서 드는 의문: 아이의 스킴들은 어떤 상황에서 아이의 배우기를 압박할 당황스런 결과들을 만들어내는가? 감각운동 수준에서, 아이가 구성한 영속 대상들, 그리고 그것들과 빈번한 상호작용은, ‘<몸을 포함한> 물리적’ 세계를 발달시키는 행위패턴 네트워크를 확장, 정교화 하는 무수한 기회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아이의 경험 세계는 여타 사람들 또한 담아내기에 이르고, 그들과 아주 꾸준한 상호작용은 더욱 풍부한 요동의, 그리고 잇따르는 조정들의 원천이다. 삐아제는, 조정을 가장 빈번하게 야기하는 원인은 타자들과 상호작용, 특히, 타자들과 언어적 상호작용임을 수없이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적 성분(部門)을 고려치 않았다는 비판을 자주 받고 있다. 그러한 비평가들이 평소 내세우는 주장은, <어른이나 교사들은 아이나 학생들한테 그들과 상호작용을 거쳐 지식을 전송(傳送)하고 있으며, 그 지식의 일정 형식들은 사회에 고유한 것이 되어 그 집단에서 개체로 직접 전이(轉移)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에서 개인으로 그와 같은 전이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여하한 메커니즘도 이제껏 설명된 바가 전혀 없다. (언어가 이러한 활약을 수행할 수 없음은, 앞장 소쉬르 분석에서 제시되었고, 7장에서 훨씬 더 상세히 설명될 것이다.)

 

2.

 

평형화에는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명확히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삐아제의 반복된 관찰에 함의되어 있다: <조정을 위한 가장 빈번한 계기들은 타자들과 상호작용으로 제공된다>. 이들 조정들이 요동들을 제거하고 있는 한, 이들 조정들은 개체의 개념 구조들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에서도 평형을 이루어낸다. 삐아제가 이러한 함축적 귀결을 조금만 더 강조했다면, 그의 모델이 사회적 요소를 무시하고 있다는 그러한 피상적 비판은 대체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그래서, 삐아제 모델에서 그 주체가 그 자신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접촉들은 항상 그리고 필히 같은 종류일 수밖에 없다: 개념 구조는 주체가 그것에 기대했던 결과를 야기하지 못했기에 실패한 것이다.

 

4.

 

물정(物情)을 알고 갖춘 이러한 수준에 이르면, 이들 ‘타자들’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그리고 제어하려는 데 엄청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경험장(經驗場)에, 계속해서, 타자 모델들, <움직이고, 지각하고, 계획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철학적 사색까지 하는 타자들, 그 자신이 경험에서 스스로 추상했던 개념, 스킴, 그리고 규칙들과 같은 종류들을 귀속시킨 타자들>에 대한 모델들이 거주토록 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들 모델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당수 지식은 우리 자신이 자신들의 경험을 다루면서 찾아냈던 바이어블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들 타자들 가운데 특정 인물이 특정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측할 때, 그 예측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한테 귀속시켰던 특정 지식 조각이다. 만약, 그때, 그 타자가 우리 예측대로 행한다면, 그 지식 조각은 우리 자신의 행위 구역에서 뿐만 아니라 그 타자의 행위 구역에서도 바이어블한 것으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그 타자가 지니고 그에 맞게 행하는 것으로 우리가 전제(當然視)했던 지식과 추리에는 2차 바이어빌러티가 부여된다. 

 

이러한 종류의 확신에 대한 가치 평가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개체의 그밖에 구성하기 에이전트들에 대한 구성이 우리가 우리 경험 세계에 갖추는 물리적 대상들의 구성보다도 더욱 자유롭지 <즉, 맘(意志)대로 되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타자들 구성은, 계속해서 훼방 받으며, 그렇기에, 방향 잡혀지지만, 그렇다고, 제약들로 기능하는 장애들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5.

http://www.cysys.pe.kr/zbxe/RRC/324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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