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발생적 인식론(genetic epistemology)

1.

내가 마주한 주된 목표는, 영어 텍스트로 삐아제를 가르쳐야 했던 까닭에 생겨난, 그의 ‘발생적 인식론’의 골격(骨格)를 형성하는 구성주의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2.

생명체한테, 이어, 그 우주는 진짜 실재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리 가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Kelly, 1963, p.8) 

 

삐아제도 그의 발생적 인식론으로 의도했던 바를 설명했다: 

 

이상, 요약하면, 발생적 인식론은 지식의 형성과 의미 모두를 다룬다. 우리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인간 마음은 어떤 수단을 써서 덜 충분한 지식 상태에서 더 높은 지식 상태로 가는가? 무엇이 더 낮거나 덜 적합한(adequate) 지식이고 더 높은 지식인가에 대한 결정은, 당연히 형식적이자 규범적인 면들을 갖는다. 지식의 특정 상태가 다른 상태보다도 더 우월한지 아닌지 결정짓는 것은 심리학자의 몫이 아니다. 그러한 결정은 논리학자나 특정 과학 부문 전문가들 몫이다. (Piaget, 1970a, pp.11–12)

 

비코, 버클리, 비트겐쉬타인, 그리고 케카토를 거치며 준비되었기에, 나는 이 인용구를 삐아제가 허다한 지점들에서 지식은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고 반복했던 바의 자연스런 연장으로 읽었다. 

 

 

 

 

 

3.

1970년대 초반, 삐아제는 미국에서 재차 유행을 탔고, 이때는 이전에 강조되었던 ‘시기(段階) 이론’보다는 그의 구성론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대단히 많은 필자들이, 인식론에 대해 삐아제가 취한 입장의 원리들을 못 알아차린 것 같았음에도, 구성주의로 방향을 틀었다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학교육의 연구자들은 아이들이 그들 인지 구조들을 차츰차츰 쌓아 올린다는 생각(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은 동화시켰지만, 삐아제가 지식 개념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그래서, 발생적 인식론을 가르칠 때, 나는 내 접근을 학생들이 어디선가 읽고 있을 trivial(시시한) 구성주의 버전들과 구별하고 싶었다. 내가 작업하고 있던 모델에 ‘radical(근본적, 급진적)’을 붙였고 기본 원리 두 개를 제시했다: 

 

지식은 인지 주체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쌓아올린 것이다;

 

인지 기능은 적응이자 경험 세계 조직하기이지 존재론적 실재의 발견하기가 아니다.

 

 

  

 

 

4.

쟝 삐아제 협회 1975년 필라델피아 모임에서, 나는 최초로 많은 일반인 앞에서 발생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 해석을 발표했다. 본 회의가 시작되자 토론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임은 중요한 두 인연으로 이어졌다. 삐아제의 오랜 공동작업자, 허먼 싱클레어는 내 작업을 계속하도록 적극 북돋았고, 내 최초의 제네바 방문도 바로 그녀 덕택이었다. 또한, 그 발표로 매사츄세츠 대학 물리학과에서 인지 관련 삐아제 연구그룹을 출범시키고 있던 잭 록헤드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 몇 해에 걸쳐 록헤드는 나를 초청해 개념 분석에 관한 워크샵을 맡겼던 건, 그와 그의 동료들이 개념 분석으로 기대되는 보다 효과적인 물리학, 수학 가르치기 방식을 발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5.

인과성에 대한 재평가에서,

 

이와 같은 순환성의 특징은, 칸트의 선험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경험에서, 에다, 일관된 세계 그림(象)을 생성시키는 방식과 같은 여하한 합리적 모델 구성 시도에서도 불가피한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신비주의자들이 시적 은유로 메우고 있는 협곡(峽谷)들이 연결된다. 순환성이란 피해갈 수 없는 것임을 구성론자는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이것을 최소로 줄이고 싶어 한다. 인과성의 경우, 그럴듯한 개념적 분석은 훨씬 이후 삐아제의 발생적 인식론에 이르러서야 제공되었다. (3장을 보라) 

 

 

6. 

개체 동일성에서, 

 

아이의 실재 구성의 마지막 장에서, 삐아제는 서양 철학을 그 시초부터 괴롭혔던 주체–객체 관계 문제와 맞붙었다. 극히 중요한 것으로, 삐아제 저작들 여타 많은 구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관심사는, 여기서도, 발생적 인식론, 즉, 지식에 대한 개체–발생학이지, 존재론이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인지하기 ‘무엇’을 전제(當然視)한 다음, 이러한 ‘것(者)’이 점차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능동적 경험에서 ‘밖(外部)’으로 격리, 범주화 가능한) 모든 것들과 구별한다고 제안한다. 후기 저작에서, 그는 이러한 발달을 간결하게 특징지었다: 

 

… 이러한 [감각운동] 시기가 끝날 쯤, 즉, 언어와 생각이 시작될 때, 그[아이]는 전적으로 실용적 목적들을 위해 그가 점진적으로 자신을 구성했던 시공간으로서, 그런 연후, 외부로 경험하는 우주, 거기에 있는 여타 것들 가운데 하나의 요소 또는 하나의 ‘것(者)’일 뿐이다. (Piaget, 1967b, p.9)

 

 

 

7. 

삐아제 추상이론에서, 

 

실험관찰적(經驗的) 추상은 관찰 가능한 것들과 관련되며 반성적 추상은 정렬과 관련된다. (Piaget et al., 1977a, Vol. 2; p.319) 

 

그래서, 두 종류 추상들은 그 원천이 외생적인가 내생적인가에 따라 구별될 수 있다; … (Piaget, 1974c, p.81) 

 

발생적 인식론의 정신(心的-定向)에 진입한 이라면, 이들 진술의 단순함에 속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표현들 ‘관찰 가능한 것들’과 ‘외생적’은 실재론적 의미로서 외부 실재의 외관이나 요소들로 해석되기 쉽다. 그렇지만, 지식에 대한 삐아제 이론을 보건데, 이것은 그 표현들로 의도했던 방식이 아니다. 사실, 각 인용구들 다음에 아주 적절한 경고들이 이어진다. 

 

 

 

 

8.

 형식과 내용에서,

 

추상들의 무한 역행적 생각을 반박하는 두 번째 이유의 근거는 발생적 인식론의 발달 기초에 있으며, 여기 논의와 직접 관련된다. 아이의 인지 이력은 의심할 바 없는 발단(發端)을 갖고 있다: 말인즉, 유아가 출발하며 지닌 것과 같은 그러한 고정된 행위 패턴들(반사들)에 모든 경험을 동화시키는 또는 동화시키려 하는 최초 발달 시기를 갖고 있다 (Piaget, 1975, p.180). 초기 고정성을 제외한다면, 이들 행위 패턴들은 아이가 바로 뒤이어 확장하는 경험에 기초해서 정렬시키기 시작하는 스킴들과 비슷하게 기능한다 (3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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