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발견되는 삐아제(Discovering Piaget)

        발견되는 삐아제

 

내가 쟝 삐아제 저작에 입문하게 된 것은, 내가 깊은 애정으로 기억하고 있는 고인 챨스 스먹 덕분이다. 그 누구보다도 내 말년의 생각하기에 영향을 끼쳤던 저자를 소개받기 위해 과연 미국까지 왔어야 했으며 연구할 일자리마저 잃어버렸어야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밤, 챨스는 언어와 인식론에 관해 나와 아주 긴 대화를 나누던 중 말했다: ‘그것 참 재밌군! 자네가 말하는 꽤 많은 걸 삐아제한테 들었거든’. 그래서 삐아제를 읽기 시작했다 – 그리고 챨스는 제네바에서 취득해 모은 많은 텍스트를 갖고 있어서, 나는 프랑스어로 삐아제를 읽었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영어만 읽을 수 있는 학생들한테 삐아제에 관한 교과 과정을 가르치면서, 나는 번역서로 삐아제의 방향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았다. 거의 몇몇 예외(이를테면, 울페 메이스 또는 엘레아노 덕워스)을 뺀, 번역가들은 순진한 (즉, 소박 실재론적) 지식 이론을 갖고, 삐아제의 원본 텍스트에서 그들이 읽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왜곡해 그들 자신의 세계관에 들여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모든 걸 이렇게 처리할 수는 없기에, 그 번역들은 삐아제의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관념, 혹은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관념을 자주 전하고 있다.** 

 

** 나도, 실은, 이 측면에서 저지른 바가 있다: 그건, 프랑스어에서는 ‘mind’에 상응하는 명사가 없기에, 삐아제의 프랑스어 intelligence가 많은 맥락들에서, 마음’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쾌 상당 기간 ‘intelligence(知性)’로 번역했다.

 

 

    수학 교육자한테 관심거리는 삐아제 책, 수에 대한 아이의 구상(The Child’s Conception of Number)(1952a) 영어 번역판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적으로 불가해한 생략이 표지를 포함한 도처에 있는데, 그 2차 저자 이름은 앨리나 체민스카 교수(워쏘 대학)이며, 삐아제는 그 서문에서 그 책에 쓰인 독특한 분석 방법들의 발달을 가능케 한 그녀의 재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곧이어 개별 용어들에 대한 빈번한 오역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점진적 변화(gradation)’ 대신 “등급 분류(graduation)”을, ‘동일 측면에서 똑같이 만들기(equalizing)’ 대신 “상이한 측면들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equating)”을 쓰는 식이다. 가장 심각한 건, 수 관련 주제로, 모음, 양, 열, 수열, 급수, 등등 프랑스어 표현에 대해 이 번역가가 단어 ‘집합’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번역서를 읽은 영어권 수학자들이 아래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대체, 어떤 얼간이가 집합이 뭔지도 모른 채 수(數)에 관해 쓴단 말인가!(삐아제가 얼간이가 되는 순간!!!) 

 

    독자의 이해하기는, 설명적 표현들, 때론 전체 구절들에 대한 빈번한 생략으로 더욱 방해받고 있다. 이 책과 또 다른 책들에서 용인될 수 없는 번역은, 나한테, 영어를 쓰는 학생들한테 삐아제의 사상을 조금은 덜 뒤틀린 형식으로 제시하려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렇지만, 오역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 내 최우선 목표는 아니었다. 내가 마주한 주된 목표는, 영어 텍스트로 삐아제를 가르쳐야 했던 까닭에 생겨난, 그의 ‘발생적 인식론’의 골격(骨格)를 형성하는 구성주의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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