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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철학(philosophy of science)

1.

지식에 대한 구성론적 접근 발전에 있어 그 출발부터, 과학철학은 분명 우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취사선택해 읽은 것들 가운데, 특히, 한 작가는 거절하지 못할 도전장을 내밀었다. 

 

칼 포퍼(1968)는, 과학의 도구주의적 시각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이어 그 시각이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알아차릴 그의 반박의 최종적 기반이란, 그저 <과학적 이론은 ‘주어진 상황에서 도구로서 바이어빌러티를 갖는 수준’ 너머에 있는 옳음(‘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라는 그의 형이상학적 신념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신념의 초석들이란, 그의 개념들, 반증가능성과 결정적 검사다. 포퍼는, <아인슈타인 이론에 대한 반증에는 실패한 그러한 결정적 실험들로 ‘뉴튼’ 이론이 허위화(反證)되었다는 사실은 뉴튼 이론이 일정한 경험 여건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도구주의에는, 그의 말대로, 그와 같은 검사와 맞먹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도구는, 분명, 고장날 수도 한물갈 수도 있다. 하지만, 디자인 가능한 가장 가혹한 검사들을 버티지 못할 경우엔 그 도구를 버리기 위해 우리가 그런 검사들을 한다는 건 도데체 말이 안된다: 모든 비행기 기체(機體)에, 이를테면, ‘파괴도 검사’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혹독한 검사는 기체가 파괴될 때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적용 한계 내에서 (또는 안전하게) 쓸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즉, 기체에 대한 이론을 검사하려는) 것이다. 

 

이론은, 실제적 적용이라는 도구적 목적을 위해, 반박된 뒤에도 그 적용 한계들 내에서 계속 쓰일 수 있다: 뉴튼 이론이 허위로 판명되었다고 믿는 천문학자라도 그 수학적 형식을 그 적용 한계들 내에서 적용하는 것에 주저치 않을 것이다 …

 

도구는, 이론을 도구라 한다면 그 이론까지도, 반박될 수 없다. 도구주의적 해석은, 고로, 진짜 검사들, 말인즉, 시도된 반박들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상이한 이론은 상이한 적용 범위를 갖는다는 주장 이상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때 그 해석은 과학적 진보에 대해 결코 해명할 수 없다. (Popper, 1968, pp.112–13) 

 

이에 의거하여, 포퍼는 도구주의를 ‘蒙昧主義(obscuranist) 철학’ (p.113)이라 결론짓다.

 

나한테, 이 구절은 진정 계몽적(啓蒙的)이었다. 분명히, 포퍼는 도구주의의 습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천문학자 사례는 NA SA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인간을 달에 보낼 때 했던 작업 방식을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그들 모두 행성계에 대한 뉴턴 이론이 더 이상 진리로 간주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뉴턴 이론 공식이 아인슈타인 공식을 쓰는 것보다 더 간편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기에 뉴턴 공식에 따라 모든 걸 계산했다. 

 

그럼에도, 포퍼는 과학적 진보(進步)라는 생각(思想)에 몰두한 나머지, 용어 ‘반박’을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도구로 쓰였던 이론이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하는 (또는, 내 쓰는 말로, ‘바이어블’하지 않는) 여건의 발생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론이 결정적 실험에서 false(不通)로 드러나는 경우다 (여기서 ‘false’는 ‘true(참(眞))’의 반대(거짓(僞))로 해석되고 있다).

 

이곳이 바로 형이상학적 신념이 게임을 시작하는 곳이다. 사실, 포퍼 자신은 그가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식의 성장’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 장의 끝에서, 비록 각주에서지만, 쓰기를: 

 

나는 여기서 검증주의 냄새가 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한테 그 정도 냄새는 참고 견뎌야 하는 경우로 보인다; 이론을 그저 탐구 도구로만 여기는 그 어떤 형식의 도구주의를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 (ibid., p.248, 내 강조) 

 

이것이 바로 차이이다. RC는 거리낌 없는 도구주의다. RC는 (독립된 실재에 대한 참된 재현(表象)으로서) ‘진리’ 개념을 주체의 경험 세상 내 ‘바이어빌러티’ 개념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RC는 모든 형이상학적 책무를 거절하며, 살기(生活) 주체들로 우리가 구성한 세계, 우리가 알게 될 유일한 세상에 관한 가능한 하나의 모델 이상일 수 없음을 주장한다. 처음 접한 경우 RC는 어렵고 태도에 대한 충격적 변화이기에, 내 한번 더 반복하고 싶은 건, RC는 형이상학적 추측이 아닌 단지 사용함으로써만 가치가 가늠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로 의도된 것이기에, 그것의 진위(眞僞)을 묻는 것은 어긋난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점이다. 

 

 

 

 

 

 

2.

오늘날 과학철학에서까지, 실재론의 천년 전통과 그것의 목표인 객관적 지식을 전복(顚覆)시키는 아이디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격변에 직면하여, 확립된 인식론과 다른 시각(見解)의 역사를 검토하는 것은 적법하며 적절하달 수 있다. 

 

나한테, 이러한 검토는 특별한 관심거리다. 구성주의의 허다한 개척자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내 희망 때문이 아니라, 체제로서 확립된 시각에 맞섰던 사상가들의 기록은 알기 문제에 대한 근본적으로 상이한 접근 필요성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갈릴레이의 유명한 제자, 토리첼리는 이를 아주 분명히 표현했다:

 

운동(de motu) 학설 원리들의 진위(眞僞)는 나한테 별로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참(眞)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참인 것처럼 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한 다음, 그것들에서 끌어낸 여타 모든 추정(推定)들을 기하학적이자, 혼합되지(경험적(實驗觀察的)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 이리 된다면, 갈릴레오와 내가 말했던 모든 게 그리 될 것이다. 그때, 쇠나 납 또는 돌로 된 공의 운동이 우리의 계산과 안 맞고, 원리들과 너무 심하게 어긋난다면,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Belloni, 1975, p.30)

 

이 인용구는, 오늘날 과학철학에 활기를 주는 토론에, 과학과 그 이론들의 객관성이 다양한 입장들에서 쟁점이 되는 토론에 잘 들어맞는다. 구성론 관점에서, 양자론(量子論) 발명 훨씬 이전, 갈릴레이가 초반에 ‘자연의 책은 수학 언어로 쓰여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믿지 않고, <수학이란 자연에 대한 인간 경험을 정리, 관리함에 있어 쾌나 말끔한 인간 방식이라는 생각>으로 더 기울었던 위대한 과학자들이 있었다는 발견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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