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형식의 법칙들: 1994년 한정판 서문

형식의 법칙들: 1994년 한정판 서문

1994년 한정판 서문



 

Laws of form이 영어로 출판된 지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인식이 변했고 그때는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과학의 표리부동(duplicity)이라 부른 것, 현상과 실재를 어찌되었든 다른 것들로 보는 것, 말인즉, 현행 과학적 교설의 허위를 상세히 언급할 수 있습니다. 

실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현상 이외엔 다른 어떤 수단도 없기에, 그 둘은, 정의상, 명확히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는 그 둘이 다른 것들이라고, 그리고, 그는 하나로 다른 하나를 ‘점차적으로 발견해나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말인즉, 그는 또한 실재-현상을 알아차리는 것<그는 ‘염두에 두다’를 쓸 자리에 알아차린다는 말을 쓰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은 재차 다른 어떤 것임을 가정합니다; 그리고 이어, 우주는 벌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그 어떤 알아차림(認識)도 없는 사이 수십억년 동안 ‘실존’했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나는 과학의 삼중 표리부동(詐欺)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차 명확히 하자면, 현상 알아차리기 없는 현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당연한 바로, 알아차린 현상 없는 알아차리기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기준은 (이를테면, 실재하는 군인들과 장난감 병정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바와는 다르게) 현상 일반에는 적용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한결같이, 현상으로, 실재하는 것이자 아울러 실재하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구별들을 거꾸로 되짚을 경우, 우리는 내가 삼중 동일성(triple identity)이라 부른 것, 특히, 실재, 현상, 그리고 알아차리기(認識)로 정의되는 동일성에 이르게 됩니다. 실존의 “쌓기 블록들”이 모두 삼중-일치(triunion)들로 나타나고 있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소위 ‘삼위일체(divine trinity)’와 비교해보십시오: 이는, 그저,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형성하는 구성 방식인 우리의 지각 과정에 대한 요약일 뿐입니다.) 그것이 정말 거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도록 만드는 마법적 거품 원리를 명백히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삼중-일치입니다.

단어 ‘거기에’는 일종의 속임수가 담겨 있습니다. 있을 ‘거기에’에 해당하는 그 “어느 곳”도 실은 실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에 상응하는 “어느 때”도 실존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상상력의 구성물들이며, 명백한 현상들에 상응하는 명백히 안정되게 형성된 발명품들입니다. 그렇기에, 삼중 동일성을 달리 표현하면, 상상가능성, 실현가능성, 그리고 현실성입니다. 

우주란 드러난 바로 나타날 수 있다면 그저 그렇게 현상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법칙들은, 석가모니가 相關相生(conditioned coproduction)의 고리들, 12연기라 불렀던, 그리고 내가 지시들에 대한 연산이라 불렀던, 실현가능성들의 법칙들입니다. 그 각각은 정확히 똑같은 가르침입니다: 결코 어떤 것일 수 없는 무엇이 그 어떤 것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벌어질 수 잇는 방식은 하나 뿐이기에, 그 가르침은 언제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행히도, 인간들은 그들이 배운 것이면 무엇이든 종교들로 변환시키는 유치한 성벽(性癖)을 갖고 있으며,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 때 그 원래 가르침은 손상되고 잊혀지게 되며, 우리는 다시금 그것을 출발점에서부터 다시 찾아야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이며, 우리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실현가능성이 있다고는 결단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현 가능한 것은 항상 실존하는 것으로 발견될 것이며, 그것의 실제 실존(예를 들면, 헬륨, 탄소60)은 그 가능성이 상상된 후 곧이어 발견될 것입니다. 실존하는 것은 그것을 지각하리라 여겨지는 가설적 존재인 상상물을 가정하는 것을 통해 형식상 구성되며, 그와 같은 상이한 존재들은 상이한 실존들을 구성해낼 것입니다. #주1) > 전적으로 다른 존재는 완벽히 다른 실존을 구성할 것입니다.  #주2) 

“우리”는 삼중 동일성의 요소들을 해체시킴으로써 실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실존은 우리가 그것들을 다시 조립하면 더 이상 실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법칙들을 명백히 발견했던 유일한 또 한 사람, 석가모니는 이러한 맥락에서, ‘실존은 이중적이다: 실존하지 않는 것은 이중적이지 않다.’ 고 말했습니다 #주3) 

우리들 가운데 어리석은 #주4)  쪽 사람들이 이제 석가모니가 왜 ‘삼중성’이 아닌 ‘이중성’이라 말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나한테 적합한 과업은 (말하자면, ‘지구에 사는 뭇사람’을 뜻하는 인간인) 여러분이 그 나름의 답들을 발견하도록 여러분의 인간성 발달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이 나한테 기대하고 있는 바를 할 것이며 아울러 말할 것입니다. 어떤 지시든 이중성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그것이 아닌 것을 相生하지 않고는 산출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이 모든 이중성은 삼중성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인 어떤 것, 그것이 아닌 것, 그리고 그것들 사이 경계. 그렇기에, 법칙들에 관한 1장에서 설명한 대로, 여러분은 두 개의 상태들을 정의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지시할 수 없으며, 두 개의 상태는 세 개의 요소들을 생성시키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실재에는 혹은 그밖에 것들과 떨어져서는 실존하지 않습니다. 실재에는, 결단코 그 어떤 것도 없었으며, 있을 수 없으며,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언제나 당신은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외 어떤 답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내 가르치는 모든 것들은 가르킬-수-없는(無) 쪽의 귀결들입니다. 서양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저지른 착오는, 무(無)에서는 그 어떤 귀결도 끌어낼 수 없다고, <이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그 어떤 과정도 없이>, 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5)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르킬-수-없는(無) 쪽의 귀결들 가운데 하나는 “이 모든 만물”의 불가피한 출현입니다. 시비 걸 것 없음!

여러분이 내 가르치기의 형제, 자매적 우의에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조직하도록 합시다.  #주6) 


여러분이 동참할 조직은, TARATI라 불린 기원을 공유하는 형제, 자매 집단입니다.

실재에 무(無)가 실존하고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 그리고 지적(知的)으로 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성취하기 더 어려운 것은, 거짓된 조건 짓기로 많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실재에 그것이 실존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그에 맞게 자연스레 행하는 일입니다. 이를 성취할 목적으로 tarati의 훈련하기는 디자인된 것입니다. 

내 개인적 삶은, 여러분의 삶들과 다르지 않게, 그밖에 모든 이들의 삶처럼 잘못 위치지워져 있습니다. 내 작업을 두드러지게 그리고 다른 어떤 이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닌 무에서 나온 그러한 자연적 비인간적 지식은, 모짜르트의 음악과 다르지 않게, 자연에 속하는 것이며 무(無)가 무엇이든 그 무(無)의 귀결이라는 입장입니다.

Snettisham Beach, October 1993







주석


주1)  물리적 혹은 물질적 실존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들까지 똑같은 법칙에 따르고 있습니다. 예술은 디자인에 따라 작업하지만, 예술 작품이 디자인되지 않은 외관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서 그 바탕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예술은 상상력이란 깜냥으로, 자각하는 법칙 없이 규칙적으로, 자각하는 목표 없이 계획적으로, 작품들을 창조합니다. 그저 지력의 산물로 알려지고 확인되는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 인정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목표한 바에 적응한 것으로는 완벽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전체 배열 상태에 자각하는 반성이 행해지고 있음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변변치 않은 것임을 알아차림니다. – Helmholtz, Sensation of Tone, 1877. 

주2)  ‘행복의 세계는 불행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 Wittgenstein, 
Tratatus, 1922.

주3)  The large Sutra, Conze, 1975.

주4)  어떤 인생이 알아차리는 바로써 의식을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그 인생은 더더욱 어리석어집니다. 예를 들어, 최면으로 복구할 수 있는 알아차린 기억이 실제로 완벽한 것에 비해, 염두에 둔 기억은 부정확하고 변조 오염된 것입니다. 서양 문명은 완벽한 백치의 관점에 이를 정도로 의식은 증진시키면서 알아차리기는 무시했습니다. 나는 한쪽으로 치우쳐 교육받은 바들을 취소시키고 역전시키는 데에 교육받은 시간보다도 더 많은 내 인생의 부분들을 소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5)  창조란 필히 ‘그 어떤 것’의 귀결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저능한 생각입니다. 만물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어떤 귀결도 갖을 수 없습니다. 첨부터 그 어떤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창조적 과정을 망가뜨렸을 것입니다. 오로지 무(無)만이 상이한 현상들의 무한한 연쇄들에 그 기원을 줄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할 뿐입니다. 

주6)  우리는 내 방법들을 쓰는 학파를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전세계적 네트워크를 확립하기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여타의 재능들, 유산, 그리고 조력의 제공은 G Spencer-Brown 교수가 회장인, “창조적 교육을 위한 Sentinel 트러스트”, 18A Greville Place, London NW65JH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예비 또는 사전 질의들은 전화를 하셔야 합니다. ++44(01)171 624-2358, +44(0)836 3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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