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형식의 법칙들

각 장에 대한 메모들:  노트1, 노트2

각 장에 대한 메모들

 

 

1장 주석

말해질 것이 무언가 더 있다할지라도, 1장에서 독자가 오로지 염두에 둘 것은 닫힘의 형식으로서 구별 정의와 이 정의에 속하는 두 개의 공리들 뿐입니다.

 

2장 주석

 

   이 단계에서, 수학적 소통의 일차적 형식은 기술이 아니라, <금지 혹 허용> 주문(injunction)임을 깨닫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요리와 같은 실용적 예술 형식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케이크의 맛은, 기술할 수는 없을지라도, 요리법이라 불리는 일련의 주문(注文)들의 형식으로 독자한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음악도 비슷한 예술 형식입니다. 작곡가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일련의 소리들을, 더더구나 이를 통해 야기된 일련의 감정들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들을, 이에 독자가 응할 경우 독자한테 작곡가의 원초 경험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 있는 명령들을, 적어놓고자 합니다.

   Wittgenstein이 [명제 7, 4]에서 말한,

             말할 수 없는 것,

              그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에서, 그는 오로지 기술적 발화(記述的 發話)만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기술하는 수학자는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다’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는, 자신의 작곡을 경유한(through) (말인즉, 제한되지 않은) 일련의 명백한 엑스터시들에 대해 기술(말인즉, 제한)을 시도하고자 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비참하게 실패할, 작곡가한테도 똑같이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곡자든 수학자든, 이러한 이유로,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논고(Tractatus) 서문에서, Russell이 다음과 같이[p22] 말할 때, 그가 표현한 것은, 그와 같이 Wittgenstein의 마지막 명제의 올바름에 관한 정당한 의혹으로 보입니다. 

주저하게 하는 것은, Wittgenstein씨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상당한 것들을 감쪽같이 말하고 있다는, 그래서, 의심스러워하는 독자한테 언어의 위계를 통해 또는 그밖에 탈출구를 거쳐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탈출구는, 여기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언어가 갖고 있는 주문(注文)하는 깜냥에 있음이 명백합니다. 

   자연과학조차도 우리가 통상 인정할 준비가 된 것 이상으로 주문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자로서 직업적 입문은 적절한 교과서를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현미경을 들여다 보시오’와 같은 명령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현미경을 들여다 보고나서, 이제 그들이 보았던 것을 서로한테 기술하고, 함께 토론하고, 이어 이를 기술한 논문이나 교과서를 쓰는 것이 규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하게, 수학자들이, 주어진 일련의 주문들을 따르고나서, 그들이 보았던 것을 서로한테 기술하고, 함께 토론하고, 이어 이를 기술한 논문이나 교과서를 쓰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경우, 기술은 최초 따랐던 주문 집합에 의존하며,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작곡한 악보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런저런 악기로 작곡자의 명령들을 우리 자신한테 도해(圖解)함으로써(by illustrating) 그렇게 합니다. 비슷하게, 우리가 수학 작품을 깨달을려면, 수학자의 명령들을 우리 자신한테 도해하는 방식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일을 처리하는 통상 방식은 일종의 기록자와 판판한 득점판으로, 이를테면, 손가락과 조수(潮水)로 반반해진 모래판, 또는 연필과 종이로 행해집니다. 도해하기 위한 그와 같은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는 이제 2장의 명령들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우선 원 또는 원에 가까운 것과 같은 형식을 도해할 수 있습니다. 자체로 평면을 도해하고 있는 평평한 종이가 이러한 목적에 유용한 수학적 도구인 것은, 그러한 공간에 있는 원이 실상 구별을 하나 그리고 있다는 것을 어쩌다 우리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테면, 원환체(torus) 표면에 쓰는 것으로 선택했을 경우, 원은 구별을 그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명령,

        그 형식과 구별된 형식이 존재하도록 하시오

에 이르면, 우리는 새로운 종이를 가져다 (또는 다른 모래판으로 옮겨) 그것을 도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별개의 형식에서, 우리는 명령,

       구별 표식이 그 형식에서 그와 같은 다른 형식으로 복사되도록 하시오

를 도해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독자가 자신의 도해들을 그 텍스트에 있는 명령들에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텍스트의 명령들과 일관된, 또는 일관되지 않는, 그 자신의 도해들을 발명하면서, 내키는 대로 배회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그렇게 그 자신의 탐구로써만, 수학자들이 말하는, 세계의 경계들 또는 법칙들을 뚜렷이 보게 될 것입니다. 비슷하게, 독자가 어떤 지점에서든 그 논증을 쫓지 못할 경우, 그 진행 방식을 볼 때까지 그가 그 지점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불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끝을 볼 때까지는 어떤 것의 시작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수학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완벽한 상, <그가 핵심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바에 대한 주문(order)을, 그가 그것을 제시하는 어느 정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주문(order)>을 주는 것입니다. 독자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 임의적 주문(order)을 아주 적법하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필수적 절차에 따라, 무엇을 불러 존재하도록 하는, 존재의 어떤 주문(order)을 불러내는, 주문(order)으로 불려진 또는 확립된, 그리고 보통은

       무엇무엇이 있도록 하시오

와 같이 자유재량을 허용하는 형식들로, 또는 가끔씩은

수직선을 내리시오

와 같은 더욱 특정한 활동적인 형식으로 이행되는 명령(command)들을; 준거점들 또는 표지들로 쓰이게끔 주어진 이름들을; 지시들의 조작과 관련해서, 이미 명령된 또는 주문(order)으로 불려진, 우주라면 그 어떤 우주에서든 효과를 보도록 디자인된, 지침(instruction)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통상, 이름짓기 관례 혹은 의례는 형식,

          무엇무엇을 여차여차한 것이라 부르시오

로 이행되며, 그 부르기는, 기호 = 를 써서, 양방향으로 행해질 수 있습니다. 하여, 무엇무엇을 여차여차한 것이라 부름으로써 우리는 또한 여차여차한 것을 무엇무엇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짓기는 방향이 없는 것으로, 혹 달리 보면, 전방향을 갖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지침은 방향을 갖는데, 지침이 요구하는 것은, 그 방향으로, 그 자신의 이름를 갖는, 상태 또는 조건에서, 또 다른 이름을 갖는, 다른 상태 또는 조건으로 가로지르기입니다. 하여, 전자의 이름이 후자의 이름으로 불릴 수는 없습니다. 

   명령의 더 중요한 구조들은 때때로 규준(canon)들이라 불립니다. 규준들이란, 금지나 허용을 안내하는 주문들이 별자리같이 무리지어 나타나도록, 그래서, 서로 결코 의존하지 않도록하는 방식들입니다. 규준은 구성 중에 있는 체계 혹은 시스템 (즉, 기술하기) 밖에 있는 구별을 담고 있지만, 구성 명령, 이를테면, ‘구별을 그려라’는, 핵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규준이 아닙니다. 규준은 허용 혹은 용인되는 주문이나 주문들의 집합이지, 구성 혹은 창조하는 주문이나 주문들의 집합은 아닙니다.

   효과가 있어야 하는 지침들은, 창조 과정과 그것의 허용 범위 안에서, 연산이 기록되는 실제 텍스트에서는, 연산의 상수들 또는 연산자들로 명시된 지침들로 보여져야 하며, 맥락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다시 기술하지 않고도 참조될 수 있도록, 특정 이름을 지어주는 지침들로 보여져야 합니다.

   나중에(4장에서), 우리는 특정 진술들에 대한 증명 또는 정당화들이라 우리가 부르는 바를 숙고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와 같은 진술들은 이제껏 불러 모아진 규준들 또는 존속 규칙들에 함의된 혹은 그것들에서 나온 혹은 그것들로 허용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증명의 구조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은,

    여차여차한 것들은 고려하고,

     무엇무엇은 가정하라  

 

라는 형식의 주문(注文)들입니다. 이것들은 명령들이 아니라, 함의가 명백히 그리고 전적으로 부합할 수 있는 그 어떤 방식으로 초대 또는 안내입니다. 

   지시 연산을 착상함에 있어 우리의 출발점은, 기술, 지시, 이름, 그리고 지침이라는 관념들은 결국은 똑같은 것일 수 있다고 알아차리는 바에서 보듯, 그와 같이 퇴행(degeneracy)한 지점입니다. 독자가 자력으로 이를 깨닫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두번째 원시 방정식에 이르는 논증(p 5)을 (그가 쫓아갈 수 있다할지라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명령, 

가로지르기가 그 표지로 지시된 상태까지 이르도록 하시오

에서, 우리는 즉시 그 표지에 이중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가로지를 지침으로서 의미고, 다음으로는 가로지르기로 우리가 경험했던 지시자로서 (그래서 이름으로서) 의미입니다. 이 명령에 따르기 전에는 그 표지가 어떤 식이든 지시를 이행할 지 안할 지는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으로, 가로지르기로 다다른 상태가 모호하지 않게 결정되고, 그렇게, 표지가 향후 이행할 지시 또한 모호성 없이 결정됩니다.  

   지시 딸린 이름과 이름 딸린 지시의 이러한 이중적 이행은 (수학 언어에서) 관념 또는 의미들이 퇴행하는 구조로서 통상 언급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또한 (심리학 언어에서는) 하나의 상징 안에 관념들이 축약 혹 응축되는 장소로서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 상징이 권능(power)을 갖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축약 혹은 응축입니다. 다른 분과들에서처럼, 수학에서도, 체계 혹 시스템의 권능은 시스템의 우아함(말하자면, 선별하거나 뽑아내는 깜냥)에 있습니다. 그 우아함(elegance)은 필요한 만큼 많은 것들을 필요한 만큼 적은 것들로 축약해서 얻어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쉽게 그리고 실수 없이 쓰고 읽을 필요에 따라, 허용된 것 이상으로 관계들을 끌어들이는 (또는 노고를 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연산에서, 연산을 쉽게 사용하도록 하는 우아함과, 기술하는 맥락에서, 맥락을 쫓아가기 어렵게 하는 우아함을 구별할 수 있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할 일들에 대한 지시들을 몇 가지 상이한 방식들로 확인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반면, , 명백한 그리고 모호성이 없는, 극히 최소만을 남긴, 단 한번 그리고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할 일을 지시하는 주문이 제시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주문의 글자보다는 취지를 관찰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해야할 여타 지시들을 배제하며 우리가 받아들이는 주문에 대한 습관적 해석 능력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검토해 봅시다. 수학에서, 우리는 주문을 문자 그래로 단번에 받아들이는 이러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학자가 그러한 엄청난 노고를 들여 그의 주문들이 서로 용인될 수 있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한 습관을 버리지 않을 경우, 저자로서는 마땅히 들인 이러한 노고가, 저자와 관계에서 그 주문들을 승인할 위치에 있지 않는 독자한테는 넌더리나는 짓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일차 산술의 두 개의 원시 방정식들 가운데 두 번째 것을 유도한 방식은, 우아함에서 덜하지만, 아마도 쫓아가기에는 더 쉬울 것이며, 이는 치환을 때이르게 허용한 것 때문입니다.

   표지 m으로 표시된 상태를 우리가 가리키고 있다고 하고, 전에 말한 바와 같이 표지의 부재는 표지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도록 합시다. 

   지시자를 둘러싼 괄호는, 괄호 밖 공간에 있는, 가리켜진 괄호 안 상태 이외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고,
               

    이라 했으므로;치환하기로써,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로서, 이것이 두 번째 원시 방정식입니다. 

   최초 상태들 가운데 하나는 이름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이러한 제거를 위해서는 강제적인 것입니다.

   최초 원시 방정식은 다른 방식으로도 유도될 수 있습니다.

   안과 밖만을 구별할 수 있는 눈 먼 동물이 있다고 합시다. 하나의 밖과 구별된 많은 안들로 우리한테 보이는 바를 갖춘, 

                

와 같은 공간은, 탐구할 경우, 

                

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텍스트에 기술되는 관념들은 이 동물이 단연코 자력으로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세계에서, 실상은

             

와 같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물이 자신의 가로지르기들을 셀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두 개의 구분들을 하나와 구별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안과 <더 이상 어떤 게 어떤 건지 아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 밖을 구별하는 대안적 방식을 그가 지체 없이 갖는다할지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최초 명령,

구별 하나를 그리시오

를 재고할 경우, 우리는 그것이

구별 하나가 있도록 하시오

구별 하나를 발견하시오

구별 하나를 보시오

구별 하나를 기술하시오

구별 하나를 정의하시오 

또는

구별 하나가 그려지도록 하시오

와 같은 식으로 한결 같이 잘 표현될 수 있음에 주목합니다.

   하여, 우리가 여기 이토록 원초적인 지점에 이르른 것으로 보건데, 능동태와 수동태,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밖에 더욱 지엽적인 많은 반대어들은 얽혀 오랫동안 축약되어 온 것들이며, 단어들로 이루어진 형식들은 대다수가 실제보다도 더 많은 범주들을 암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형식의 법칙들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