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주의는 왜 급진적/근본적일 수밖에 없는가[1]

 

번역: 살클리

 

20세기 내내, 쟝 피아제는 구성론 발달의 선두에 그리고 지식 습득에 관한 인습적 관념들을 극복하기 위한 전투의 최전방에 있었다. 서양 역사 흐름에서, 대다수 철학자들은, "지식/앎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알게 되는가?" "지식은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의문들과 맞붙었다. 그들은 그들이 인간 주체들과 독립한,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한 논리를 써서 자신들의 답을 얻었다. 피아제는 더 단순하며 더 실용적으로 보이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그러한 전통과 절연했다: "아이는 지식이라 불리는 것을 어떻게 습득하는가?".

     철학을 업으로 하는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피아제의 지식 이론은 "발생적 오류"를 수반하며 "심리주의(psychologism)"의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성 철학적 체제는 "제네바의 호사가"의 작업에 대한 무시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피아제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주시하는 일반 대중들한테, 발생론적 인식론이란 그저 인지 발달을 설명하는 (아동 심리학의 한 부류인) 다소 추상적 이론일 뿐이다.

     이러한 초기의 잘못된 이해는 피아제의 용어 구성론이 교육적 서클들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부상했던 진술들은 "아뭏튼 명백한 것은, 아이들은 성숙한 모든 지식 전체를 단순히 삼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와 같은 것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많은 저자들은, 결탄코 전통적 인식론을 의문시하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을 구성론자로 확신하고 있다. 나로 하여금 구성론에 수식어 급진적/근본적(radical)을 붙이도록 촉구한 것은 바로 그들의 순진한 해석이었다

     모든 인간 지식은 생각하기의 전통적 방식에 따라 존재론적, 또는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에 대한 거의 "참(眞)"인 표상에 접근해야 하며, 또한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 경우, 그때 그러한 방식과 연을 끊는 것은, 정말이지, 급진적/근본적이다. 이러한 표상 개념을 대신해서, 근본적 접근은, 내가 "살클수(viability)"라는 관계로 불렀던, 지식과 실재 사이의 새롭고 더욱 실감나는 관계를 소개한다. 나름의 개념 살클수란, 간단히 적자면, 행위, 조작, 개념적 구조, 또는 이론조차도, 혹자가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을 성취하거나나 목표에 다다르는 데에 쓸모가 있는 한, 살아남아 연장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식을 우리의 경험 밖 세계에 대해 표상 가능한 것으로 주장하는 대신, 실용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지식을 경험의 권역 내에 있는 일종의 도구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한 피아제(1967)의 표현: 지식은, 실재에 대한 복사/모사를 산출하지 않으며, 대신, 적응코자 하는 목적들에 봉사한다.  

     이와 연결지어, 인지적 유기체에서 적응은 두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물학적 수준에서, 적응은 생존을 목표로 한다; 개념적 수준에서, 적응은 일관된, 무모순적 구조들을 목표로 한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근본적 접근을 지지하는, 나한테 보이는, 근거들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철학사의 도메인에서(폰 글라저스펠트, 1978, 1985, 1995), 또한 자연어의 기능하기와 연결지어서(폰 글라저스펠트, 1983, 1990), 게다가 재차 사이버네틱스라는 장(場)에서(폰 글라저스펠트, 1979, 1981). 이러한 발표 목적들에 맞게, 나는 다만 바탕을 이루는 몇몇 요점들만을 거론하겠다.

     구성론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용어 실재의 통상적 씀씀이에서 다의성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용어는, 한편으로, 모든 알기 너머에 놓인 존재론적 실재를 빚댄다; 이러한 실재는, 칸트가 발견적 허구로 여겼던, 그의 물-그-자체(Ding an Sich)와 그 기능이 같다[2] (칸트, 1787, p. 307ff; 1881-4, p.527ff). 또 다른 한편, 우리 경험에 속하는 살았던, 실감나는 실재가 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 즉 살클 수 있다고 간주되고 있는 개념적 구조들, 행위들 그리고 심적 조작들 뿐만 아니라 실패했던 행위와 사고의 패턴들에 이르기까지 - 그 모든 것을 이끌어낸다.

    용어 경험은, 의식을 요청하기 때문에, 정의하기 어렵다 -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는 그러한 현상에 대한 살클 만한 모델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 의식에 다다르는 모든 것은 경험 된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겠지만, 당연히 그러한 정의는 너무 협소할 것이다. 이를테면, 최면 상태에서, 우리는 그때까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들의 흔적들과 관념들까지도 그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나는 작업 가설 하나를 진전시키기로 결정했다 - 이에 따르면, 경험은 감각들 그리고 우리가 알아차리는 경험의존적, 반성수반적 추상들로 이루어진다.[i]      

     둘째, 인지적 주체는 경험의 권역 내에서 작동하며, 이러한 경험은 주의 과정에 고유한 영구히 뗄 수 없는 양식인 잇달아 발하는 기능하기의 결과로서 언제나 분절되며 정돈된다. 분절된 단편들은 원래 감각, 운동 기관들의 산출물이지만, 그때 곧바로 개체적 주체가 이미 구성했던 개념들로 다듬어진다. 따라서, 경험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주관성이 갖는 이러한 요소들을 추리는 작용이 결단코 "사회적"이라 칭해질 수 있는 상호작용들의 진행에 걸쳐진 "상호주관성"의 발달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ii]      

     세째, 합리적 지식은 언제나 경험의 권역과 관계되며, 아울러 거의 규칙적이며 예측 가능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 가운데 구성되었던 추상들(개념들, 관계들, 이론들, 모델들)과도 관계된다. 이러한 예측적 능력을 갖춘 모델들을 찾는 탐색은, 적어도 지금까지 살클 수 있다고 입증된 규칙성들이 관여되고 있는 한, 미래의 경험은 과거의 경험과 유사할 것이다라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흄, 1758).     

     지암바띠스타 비코는 이성을 과학적 지식을 구성하는 인간 활동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철학자다(비코, 1710).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그의 통찰력을 발판으로 구축되고 있으며, 과학적 지식과 시인, 일반 예술가, 그리고 신비주의자의 직관 사이를 명확히 갈라 구별한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Cardinal Bellarmine이 이단으로 기소된 갈릴레오를 구하려고 제안했던 그 구별과 똑같다. 갈릴레오는, 그가 말하길, 그의 이론들을 단지 그가 예측한 것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디자인된 모델들로 제시했을 뿐이며, 그는 그의 이론들이 (교회만이 계시를 통해 접근하는) 절대적 실재에 대한 참된 기술이라고 결코 주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넷째, 구성론 관점에서, 과학적 지식은 주어진 경험 영역 내에서 살클 수 있다고 입증되었던 이론적 모델들로 꾸며진다. 특정 과학적 모델이 그 순간 가장 많이 이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모델만을 그 모델이 디자인될 때 해결하려던 문제들을 푸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더 나아가, 몇가지 해법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존재론적 의미의 "참(眞)"이 아닌, 경제성, 단순함, 또는 "우아함"을 이유로 선호될 수 있다. 구성론은, 진리 대신, 살클수를, 그리고 앞서 구성된 모델들과 양립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달리 말해, 과학적 모델은 도구들이다.

     서로 다른 여러 상황들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도구는 하나의 상황에서만 각각 작동하는 서로 다른 여러 도구들보다 분명 더 가치있다. 그렇지만, 모델들의 이러한 통합이 성취된 적은 이제까지 없었다. 현재,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가장 현저한 사례는 빛의 본성이다. 물리학은 빛의 다양한 현상들에 접근하는 데에 개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파동 개념과 입자 개념에 각각 바탕을 둔) 두 모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내 마지막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점은 언어와 관련된다. 구성론 관점은, 다시 말하지만, 언어적 소통을[3]  지식을 나르는 수단으로 여기는 전통과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그러한 견해에서, 관념들과 지식, 즉 개념적 구조들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한테로 전달하는 데에는 말하기로 족하다.   

     이러한 나름의 개념 전송이 허상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다만 한 순간의 반성만 붙잡으면 된다. 아마도 그 허상은, 언어가 관행적, 구체적 상황들에서는 아주 잘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것 같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개체 의식의 산물인) 한 조각 언어의 내용들이 어떻게 한 의식에서 또 다른 의식으로 성공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제기될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을 진실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통/통신"이라고 불리는 과정이 실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내가 썼던 것 읽기에 당신이 개입될 때, 소통은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정확히 하자면, 당신은 수신자 위치에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잠깐만 관찰해 보자. 우선 먼저, 당신은 해당 쪽에 인쇄된 일련의 검은 자국들을 지각해서, 이들 자국들을 처음에는 글자로 그리고 곧바로 당신한테 친숙한 언어 속 단어들을 형성하는 글자들의 결합들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다수 단어들의 뜻들이 당신한테 연합된 어떤 상태를 유지할 때마다 당신은 그 언어에 정통해 있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단어들에 대한 지각은 당신 머리 속 뜻들을 불러내고, 당신은 이들 뜻들을, 해당 텍스트의 문장들과 관계되는 더 큰 개념적 구조들로 발달시키고자, 합쳐 고리지으려 한다. 당신이 만약 당신한테 이치에 맞다고 보이는 구조들을 산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그 저자가 말하려 의도한 것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술하면, 그 소통 과정은 아주 간단히 드러날 것이다. 그 과정은 우리한테 매우 익숙해서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통상 타당치 못한 가설을 수반하고 있다: 그 저자가 그의 텍스트 속 단어들과 연합시켰던 뜻들은 그 단어들이 지금 독자의 머리 속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들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암묵적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가설. 이것은 보증받을 수 없는 당연시다. 단어의 뜻- 아울러 이것은 또한 모든 기호와 모든 상징에도 적용된다 -은 언어 사용자 각자가 개체로서 구성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이러한 구성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만 바탕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어떤 단어나 그 어떤 텍스트에 대한 해석도 언제나 변함없이 본질적으로 주관적 조작이다.

     물론, 아이들이 그들 모국어를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배우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단어-뜻들이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의 씀씀이와 대체로 양립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수정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뜻들이 "공유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일상 생활의 만족스러운 소통에 필수적인 양립 가능성은, 변함없이, 정확한 대응과는 언제나 일정한 간격이 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그 어떤 인물이 구체적 단어와 연합시킨 그 뜻이 우리가 그 단어와 연합시켰던 뜻과 절대적으로 똑같은지 아닌지를 결코 검증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 뜻이 이제껏 외관상 작동했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뜻의 외관상 양립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느끼기는, 언제나, 한정된 수의 상황들에 대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통에 관한 이들 언급으로, 나는 가장 민감한 가르치기 쟁점들 가운데 하나를 건드리고 있다고 믿는다. 지식이 전송될 수 없고 대신 학생들이 각기 개별적으로 구성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이 점이 가리치기에 언어가 필요 없게 되었음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단지 언어의 역할이 달리 구상되어야 함을 함의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관념들을 수신자들한테 (단어들을 써서 관념들을 마치 작은 다발들로 꾸릴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나르고자 하는 의도를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는 학생들이 짜맞추는 쪽으로 "방향잡는" 노력을 하도록 이끄는 방식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iii]  그렇지만, 누군가를 방향짓기 위해서 당신은 출발점을 취해야만 한다. 여섯살 아이들조차도 그들 머리 안에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실험들을 하며, 살아 왔으며, 아울러 그들은 맞서기(對處하기) 방식들을 발달시켜 왔다. 그들은 그들 교사들의 행위들과 단어들을 오로지 그들이 이전에 풀어 성취했던 경험의존적, 조작수반적 추상들에 따라서만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교사들이 그들 학생들의 개념적 네트워크들에 대한 나름의 어떤 개념을 갖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델이라 부른다. 명백히 그와 같은 모델들은 가설적이며 언제나 변함없이 가설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과 세련된 직관으로, 교사는 학생들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점점 더 유용한 사정(査定)들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그저 규칙에 의해 통제되는 그밖에 다른 많은 직업들의 종사자들 가운데서 가르치기를 위해 타고난 개체들을 가려낸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 자신의 심적 모델을 발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어느 정도의 흥미와 공감이다. 불행히도, 대다수 학교들에서 만연하고 있는 풍조는, 지식을 "있는 그대로" 마치 플라스크 같이 모두 똑같은 학생들 머리 속으로 깔대기를 대고 붓는 것이 실제 가능하기나 한 것처럼, 교과 과정들의 요점을 추린 지식 전송하기라는 관념에서 비롯하고 있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생각하기를 참작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동적 배우기에 대한 그릇된 환상이다. 교사가 "정확한" 답을 선점한다면, 그 교사가 학생들한테 그들이 주어진 문제를 풀려고 붙들었던 개념적 루트를 그들이 설명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은 있을 법하지 않다. 하지만, 학생을 특정 방식으로 해답으로 이끌었던 과정에 대한 분석은 그 학생의 개념들과 심적 조작들을 이해하는 데에 쓸 수 있는 최고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다.

     최종적 요점. 우리가 만약 아이들한테 문제들에 대한 그들 해법들이 잘못되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할 때, 수와 관련된 과제들에 쏟을 그들 열정이 말라버리는 일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 대신, 아이들한테 "이런 답을 어떻게 얻었지?" 하고 물을 때, 우리는 허다한 경우 그들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그들 스스로 알아낼 수 있음을 발견한다. 아이들은, 그 지점에서, 문제들에 대한 해법들을 구성해낼 수 있는 이는 바로 그들임을 알아차리며, 그리고 무엇이 작동하고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 결정하는 것도 그들 자신임을 알아차린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규제하기 시작하는 발단이자 자율(自主性)에 대한 느끼기의 발단이며, 그리고, 그 결과는 잠재되어 있는 능동적 배우기 과정의 출발이다.                

     구성론적 관념들을 교실들에 적용시킨 내 실천 경험은 거의 전적으로 초등학교 몇몇 저학년들의 산술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이러한 영역에서 작업하며 끌어냈던 일반적 결론들은 또한 물리학과 다른 교과목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일반적 접근이 새로운 관념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확신을 갖고 있다. 자기-규제(self-regulation)라는 나름의 개념은 마리아 몬테소리가 구동시켜 제공한 것이며, 그리고 그 개념은 애슈턴-워너(1963)에 의해 쓰여진 책- 그녀는 뉴질랜드의 학교에서 그녀의 작업을 묘사했다 -에서 놀랄만큼 멋지게 예시되었다. 참으로, 수많은 탁월한 교사들은, "정확한" 해답들을 반복하며 때우기보다는 언제나 그들의 학생들의 능동적 이해하기를 조장해 왔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직관에 의지해야 했다. 근본적 접근은, 유별난 직관의 재능을 부여받지 못했던 모든 교사들을 위한 출발 방침으로 기능할 수 있는, 지식, 소통, 그리고 배우기 과정에 대한 이론을 제공한다.

 


[1] Constructivism and Education (edited by Marie Larochelle, Nadine Bednarz, Jim Garrison, 1998)의 2장

[2] ‘analogous’ 통상 ‘기능, 형식을 닮거나 같은’을 함의한 ‘대응하는’; (논리학) ‘유추 관계를 갖는’; (생물학) ‘상사’를 가리킨다.

[3] ‘communication’ 신호들의 소통을 명시적으로 가리킬 때는 ‘통신’으로, 그리고 통상 ‘의사소통’으로 옮겨지는 맥락에서는 ‘소통’으로, 여러 도메인들에 공통된 형식을 지시할 때는 ‘소통/통신’ 또는 ‘통신/소통’으로 옮긴다.


     미 주

[i] 이러한 정의는,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감각들의 요소들을 결합하고 변형시키고, 그 결과로서, 지각의 대상들, 과정들, 그리고 사건들을 창조하는 작업은, 우리가 평상시는 의식하지 못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인지적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과 맞대고서 이 작업을 성취할 때마다, 나는 이를 경험의 권역 내로의 도래(到來)하기로서 간주한다.  

[ii] 구성론자한테,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명백히 객관성, 또는 절대성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한편, 그 또는 그녀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경험 세계 내에서 만들어 왔던 개인적 관찰들에 바탕하고 있는, 관찰자의 구성이다. 내 의견으로, 이것은 급진적/뿌리로/부터 구성론과 “사회적 구성론”라는 이름으로 유포되는 최근의 흐름 사이에 주요한 차이를 조성하는 것이다.  

[iii] 나는 이 용어 “방향짓기”를 Humberto Maturana에게서 빌려왔다, 그는 언어적 상호작용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나름의 개념 방향짓기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다 (Maturana and Varela, 1980, 상세히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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