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bec, 1992/8, ICMe-7,

작업 그룹 #4에서 발표된

 

근본적 구성론의 외관들,

그리고 이 접근이 주는 교육적 권고들

 

폰 글라저스펠트

Scientific Reasoning Research Institut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번역: 살클리

 

지식 이론들의 맥락에서, 이름 "Radical Constructivism"은 서구 인식론의 전통과 절연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인습에서 벗어난 바라보기 방식이며, 따라서 개념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특히, 지식, 진리, 다시떠오름(표상), 그리고 실재와 같은 몇몇 깊이 뿌리박힌 나름의 개념들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전통 관념들을 발가벗기는 일은 결코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없기에,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을 주창하거나 지지하는 이들은 때때로 위험스런 이단자들로 간주된다. 비판자들 가운데 몇몇은 명확히 진술된 개념적 차이들을 집요하게 무시하며, 구성주의 견해를 전통적 인식론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前提)에 동화시키려는 그들의 시도에서 생겨나는 충돌/모순들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19c 입자 이론의 개념들을 갖고 양자 이론 물리학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논의가 잘못된 해석들을 품지 않고 출발할 더 나은 기회을 갖도록 우리의 "post-epistemological"[1]  접근의 몇몇 요점들을 되풀이하는 것은 유용할 수 있다.

   

 

   주관성에서 빠져나갈 출구는 없다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이 발전시키려 시도하는 알기 이론은, 전통에 따른 가정, <즉 인지 활동은 인지하는 에이젼트와 따로 독립해서 그리고 그 자체로 실존하는 세계에 대한 '참된 또는 진짜' 표상에 도달해야 한다는 당연시>가 처음부터 만들어내는 환상을 야기시키지 않는 이론이다. 대신,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인지 활동이란 도구로서 기능하며, 아는 이의 경험 세계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과도 관계하지 않으며 관계할 수도 없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경험 세계는 아는 이 자신의 지각하기와 구상하기 방식들과 수단들로 조성되고 구조화되며, 이러한 근본적 의미에서 그 세계는 언제나 주관적이며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온갖 경험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요소 조각들로 분할하고 그것들을 결합시켜 살클 수 있는 "사물들"을 형성하고, 사물들에서 개념들을 추상하고, 개념을 형성하는 관계들을 수단으로 삼아 개념들을 관계시키고, 그리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험적 실재를 구성한다. 이들 개념들과 구성물들의 살클수는, 감각운동 도메인에서는, 단순히 반복하는 깜냥과 함께 시작되는 수준들의 위계를 갖고, 좀 더 높은 추상 수준들에서는, 조작적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으로 판명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구조들의 전체 레퍼토리와 무모순적인가 하는 점이 문제로 된다.

<경험 세계의 구성은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주관적인, 즉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라는 진술은 유아론을 공표하는 것으로,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는 보증받지 못하고 있다. 구성주의는 드러나지 않는 또는 이해된 경계 너머 저쪽 실재를 결코 부정한 적이 없다; 구성주의는 그저 이러한 실재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본래부터 접근 가능하지 않은 무언가의 표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경험 세계의 주관성에 대한 역설은 또한 몇몇 비평가들로 하여금 성급한 결론,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지식이 구성될 때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었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잘못된 해석이자, 다소 경솔한 해석이다. 누구든 모든 지식이 지각과 개념을 형성하는 경험에서 얻어지고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출발할 경우, '타자들'과 '사회'가 개체의 인지적 구성하기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어떤 식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 그들이 조성하고 있는 이들 타자들과 사회는, 단지 그들이 개체의 경험을 계산에 넣고 생각하는 정도 만큼만, 그 개체로서 주체한테 실존한다는, 다시 말해, <그들은 각각의 주체한테 그 또는 그녀가 그들을 그 누구로 알아보거나 새로이 구상한 어떤 이들이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알아차릴 것이다.

대조적으로, 자신들을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이라 칭하는 이들은, 사회적 맥락을 존재론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한테는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들한테, 존재론적으로 부여된 것들 없이 또는 그밖에 형이상학적으로 당연히 여기는 것들 없이 알기 이론을 구축하려 애쓰는 또 다른 학파의 흠을 잡을 자격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60 여년 전 알프레드 슈츠(1932)가 "각각의 개체 자신의 주관성에서 너의 조성과 연관된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몇 줄 뒤에 "… 그러한 분석들은 지식 이론 일반에 속하며 사회 과학에는 매개물들로 속한다"고 덧붙였을 때 아주 선명히 보았던 것이다(p.138).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정말이지 알기 이론으로 의도된 것이며, 그렇기에, 생각하기 주체가 그 또는 그녀의 경험 세계을 구성하는 가운데 어떻게 타자들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책무가 있다(cf. 폰 글라저스펠트, 1986).

   

 

  두드러진 몇몇 특징들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의 관점에서, 지식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지니게 되는가라는 의문들과 관련된 기본 관념들은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지난 2500 여년을 거치면서 그 어떤 철학자도 <존재론적 실재라는 의미에서 실재하는 세계는 인간 이성에 접근 또는 다다를 수 없다>는 회의론자들의 논리적 논증들을 분쇄할 수 없었다. 이러한 막다른 지점에 이르른 바를 보며, 구성주의는, 우리 세기 초반 실용주의자들과 비슷하게, 지식 개념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실용주의자들은, 그렇지만, 실재론에 속하는, 유물론적 또는 물질적 형식은 아닐지라도, 형이상학적 형식에 집착한 채 머무르고 말았다. 대신, 구성주의는 Vico한테로 되돌아간다: 그는 인간 지식을 인간이 구성하는 것, 그 자체 일관성과 그것이 인간 경험 세계와 들어맞음에 따라 그 가치가 가늠되어야 하는 인간의 구성물로 간주했지, 인간 경험의 경계면 너머 있을지도 모를 그 무엇으로서 신의 세계에 대한 표상(다시떠오름)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구성주의는 지식이 객관적 실재와 대등해야 또는 어울려야 한다는 의미에서 '참 또는 진짜'인 그러한 지식에 대한 요구를 단념한다. 구성주의가 오로지 지식에 대해 요청하는 것은 단 하나는, 인간 이성에 다가올 수 있는 유일한 '실재' 즉 아는 이의 경험 세계에 그 지식이 들어맞고 있다는 바로서 살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인지적 구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개념 분석에 대한 두 개척자들, 쟝 피아제와 실비오 케카토의 뒤를 따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반성과 추상을 수단으로 살클 수 있는 개념들이 어떻게 주관적 경험에서 얻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그럴싸한 모델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조망 또는 견해의 변화는 전통 철학의 몇몇 믿음들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서 유래되는 알기 행위들과 지식에 관해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대신할 귀결들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는 단지 두 가지 적절한 사례만을 들고 싶다.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과 뗄 수 없는 고유한 것은, 그 어떤 지식도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법 또는 해결책이 제아무리 살클 수 있고 만족스럽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해법으로 간주될 수는 결코 없다. (이는, 이를테면 수학에서, <해법들은 자주 전적으로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사람들이 밟는 조작들을 거쳐 또는 그러한 조작들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는 관찰과 모순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레오 사도의 훈계 "어떤 시스템이든 항상 그 자체에 적용되어야 한다" (Inhelder et al., 1977, p.61). 우리의 경우 이로부터 다다른 것은,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오래 묵은 알기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 이외에 어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이 접근이 살클 수 있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알기 이론이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맥락에 이 접근을 적용할 때 뿐이다.

 

 

   교육에 관해  

 

정말로, 여기 ICME-7에서, 우리는 철학적 의문들을 우선적으로 문제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수학 가르치기에 적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문제로 삼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앞길이 유망한 출발점을 갖고 있음에도(cf. 슈테페 et al., 1983, 1988; 슈테페, 1991; 폰 글라저스펠트, 1981 & in press), 수학 구성에서 개념을 형성하는 바탕 단계들을 분석하는 엄청난 과업을 가까스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사들은, 초등학교에서 대학원 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들에서, 언어 사용에 의탁할 수밖에 없고, 교과서는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 경험으로, 거의 모든 언어 사용자들은 언어적 의사소통(또는 통신)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치 않았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상황들에서, <우리가 말하고 타자들이 우리한테 말하는 이러한 대다수 상황들에서는 명백히 잘못된 해석은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해당 언어를 쓰는 모든 화자들이 품은 단어나 문장들의 뜻은 같은 것임을 보통 당연히 여긴다. 차이들이 있다해도 그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된다. 내가 다른 곳에서 보여준 바로서, 흔히 보는 대다수 대상들에서조차 '공유된 뜻'이라는 관념은 엄밀히 말해 환상이다. 이것이 환상인 까닭은, 우리가 단어들로 격리시키게 된 소리들과 연계 또는 연합시키고 있는 것은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주관적 경험들이 서로 다른 주체들한테 비슷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폰 글라저스펠트, 1990).

  

 

   추상들 만들기

      

한편, 여기서 우리는 수학 가르치기를 문제로 삼고 있으며, 그래서 관여되는 것은 감각[2] 항목들이 아니라 심적 조작들에서 추상된 개념들이다. 보통 감각 대상들의 경우에, 개체는 그 언어의 다른 화자들과 실제(또는 관행적) 상황들에서 상호작용을 거쳐, 그 또는 그녀의 뜻들이 그 공동체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들과 더도덜도 없이 딱 그만큼 양립할 수 있도록 그 뜻들을 조정하는 것을 배운다. 추상적 항목들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적 걸맞음을 성취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우며, 그 까닭은, 개념적 불일치들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경우들이 드물며 상호간 그럴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의 추상적 개념들을 가르치기고자 할 때 교사한테 필수불가결한 것은 학생들이 필요한 추상들을 만들어낼 경험 상황들을 발생시키는 일이다. 그러한 추상 과정들을 조장하기 위해 교사가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은 <조심스럽게 협상되고 정렬된 뜻들을 가진 언어, 또는 마투라나가 합의 또는 공감이 형성되는 도메인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학생들과 함께 쓰는 통상어를 확립시키는 일이다 (마투라나, 1980; 리처즈, 1991).

수학이란, 조작하기에 필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감각 또는 운동 소재는 무시되고 있는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작들에서 얻어진 추상 결과다. 이것은, 산술에서, 세기 행위들로부터 수 개념을 추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한 추상들은 학생들한테 부여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교사는, 말할나위 없이, 그러한 추상을 허용하거나 암시하는 상황들을 발생시킴으로써 도울 수 있다. 이곳이 조작 처리하는 깜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지만, 대상들 다루기 또는 지각하기에서 수학적 추상으로 진척이 자동적이라고 믿는 것은 고지식한 짓이다. 감각 대상들이란, 그것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잘 고안된 것들이라도, 그저 바라던 조작적 개념들이 추상되어 나올 수 있는 행위들을 위한 하나의 기회 또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바라던 추상들이란, 그것들이 교사한테는 아무리 사소하고 명백한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초보자에게는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다'는 관계는 다양한 다시떠오름들의 사용과 관련해서 이야기될 수 있다 (카풋, 1991; 제라체, in press). 하나의 다시떠오름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을 배울 때, 반성이 수반되는 추상 작용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바로 변함없이 같은 것으로 드러나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은, 다시 말해, 자동적이지 않으며, 두 개의 동등한 항목들을 단순히 교환하는 것으로 그러한 교체가, 명백한 것일지라도, 제시된다면 아마 방해받게 될 것이다. 요점은 다시떠오름들은 다르지만 그것들이 구현하고 또는 담고 있는 조작적 개념 또는 개념적 관계는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뜻(意味)들과 잘못된 구상들

이와 대비되는 점으로, 개념들을 추상하는 데는 경험적 기저가 필요하다는 바가 자주 간과되고 있다는 것은, 수학에서 오로지 문제되는 것은 상징들을 조작 처리하는 것일 뿐이라는 형식주의의 신화로 인해서다. 이로 인해, 말해진 단어들 또는 논문 위에 있는 자국 또는 표시들은 누군가가 그것들에 <그것들이 자신들을 상징으로 해서 표현하고 있는 어떤 것>, 즉 어떤 뜻을 부여할 경우에 한해서만 상징들이란 사실, 아울러 뜻은 언제나 개념적이란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 허쉬가 말한 것처럼: "상징들은, 악보들이 음악을 돕는 것으로 쓰이는 것과 꼭같이, 생각하기를 돕는 것으로 쓰인다. 음악이 먼저고 악보는 나중이다" (1986, p.19). 악보와 결부된 여하한 음악도 알지 못하는 학생들한테 악보를 가르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학교에서, 수학적 상징들은, 자주, 마치 자체로 충분한 것들인 양, 그것들에는 그 어떤 개념들과 심적 조작들도 동반될 필요가 없는 것들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논문 위 자국들을 단지 조작 처리하도록 훈련되는 경우,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왜 그것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뜻이 그들 대다수한테 이해되지조차 않고 있음에는 조금도 의아해 하지 않는다.    

뜻, 즉 개념들과 개념적 구조들이 한 쪽 머리에서 다른 쪽 머리로 전이 또는 전송되는 그 어떤 방식도 있을 수 없기에, 학생들의 머리 속 무언가가 변하기를 바라는 목표를 갖고 있는 교사들은 그러한 다른 머리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어떤 관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관념은 학생의 개념적 세계에 대한 모델을 구축하려는 교사한테는 필수적일 것이다 (폰 글라저스펠트 & 슈테페, 1991).

구성주의 조망에서 볼 때, 학생의 관념들을 수학자들, 물리학자들 또는 다른 전문가들이 정확한 것으로 간주한 구상들로 교체되어야 하는 단지 잘못된 구상 또는 착상들일 뿐이라고 (아마도 "틀린" 답들을 근거로 해서) 당연히 여기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의 생각하기가 효력을 갖추도록 하려면, 새로운 구상은 그 학생의 레퍼토리 안에 이미 있는 다른 구상 또는 착상들과 관계되어야 한다. 틀림없이 그러한 관계들을 확립시키는 몇가지 방식들이 있지만, 가장 간단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학생들한테 친숙한 요소들로 새로운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 때 그 방식은 생겨난다. 달리 말해, 학생들한테 그들이 습관적으로 관련시키던 방식과는 달리 관계를 맺도록 할 수 있는 그들 경험 속 요소들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변화를 야기시키려면, 학생들한테 새로운 방식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과 좋은 점수를 얻는 것 너머 훨씬 멀리까지 뻗어가는 살기와 생각하기의 영역에 이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게다가, 학생이 주어진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분투한 다음 교사가 그것을 "틀린" 것으로 물리치거나 재빨리 종결짓는 것은, 그 교사가 바로 "올바른" 절차 방식을 보여줄지라도 막되먹은 세련되지 못한 짓일 뿐만 아니라 부작용마저 낳을 것이다. 행해진 노력에 대한 그와 같은 무시는 필연적으로 학생의 동기 부여 조건을 망가뜨린다. 현명한 교사라면, 그 대신, 그 학생한테 그 또는 그녀가 어떻게 그러한 답을 얻었는가를 물을 것이다. 대다수 경우, 그 학생은 경로를 검토해서 (즉, 이행된 조작들에 대한 반성을 거쳐) 쉬이 풀릴 매듭을 발견하거나 이미 배웠을 절차에는 들어맞지 않고 있는 개념적 연결에 대한 실마리를 교사한테 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첫번째 것은 배우기의 귀중한 요소다: 그것은 학생들한테 그들 스스로 무엇이 작동하며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도록 할 기회를 제공한다. 두 번째 것은 교사한테 학생의 현재 조작하기 방식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며, 그래서 변화가 시도될 (그 현재 방식에 대한) 더 선명한 관념을 제공한다.

   

이러한 짧은 권고 사항들을 끝맺으며, 다소 인기없는 요점을 반복하겠다. 구성주의 조망에서 볼 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설사 그 분과가 수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유일하게 가능한 지식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 정말이지, "2 + 2 = 4"와 같은 사실이 확실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음은 조심스럽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그 사실이 신 또는 그밖에 다른 어떤 초인간적 권위가 그렇게 제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특정 방식으로 단위들을 구성하기에 이르러서 그 단위들이 세어질 방식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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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석

[1] 이 표현은 Nel Nodding의 것이다. 그는 나의 논문들 가운데 하나를 논평하며 이 표현을 썼다. (역자: 이것은 ‘기존 인식론에서 벗어난’, 즉 ‘탈인식론적’으로 옮겨져야 한다.)

[2] ‘sensory’란 형용사는 통상 수식하는 명사 앞에서 ‘감각’으로 옮긴다. 다른 텍스트에서 ‘감각적’이라 옮겨지는 경우들이 많지만, 여하튼, 이 형용사는 ‘감각을 초래하는 신경 충동을 전송하는 구조’를 가리키고 있기에, ‘감각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조’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그 구조에 동화되는 또는 그 구조에 쓰이는 <항목(item)>’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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