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bernetics and Human Knowing, 2000, 7(1), 93-95, ASC pages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성찰들

 

폰 글라저스펠트

 

번역: 살클리

 

 

나는 이 칼럼에 반성과 성찰에 대한 기고 의뢰를 받는 한편, 마거릿 미드가 미국 사이버네틱스 협회(ASC) 최초 연례 심포지엄에서 읽었던 논문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 원래는 다른 이한테 건네진 메시지를 복사한, 이메일을 받았다. 이 논문이 내 서가에 있는 책 속에 있음을 억기(憶起)했고,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내 견해가 그간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무언가를 쓰기로 맘을 먹자, 30 여년 전에 쓰여진 미드의 논문에서 출발점을 잽싸게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행복한 사건이었다. 둘째 쪽 맨 위에서 나는 읽기를:

 

내가 명확히 재고하고 싶은 것은, 처음에는 '되먹임(feedback)'이라 불렀고 그리고 이어 '실제 목적을 지닌 메커니즘들(teleological mechanisms)'이라 불렀고 또 다시 '사이버네틱스'라고 불렀던, 분과들을 가로지르는 일단의 관념들이 갖고 있는 중요성이다 (미드, 1968; p.2).

 

     그 강연에서, 미드가 '되먹임'과 '실제 목적(teleology)'으로 의도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이들 용어들로 인해 앞서 20 여년 간 쏟아졌던 문헌들의 핵심 요점들이 청중들한테 친숙한 것들임을 무리없이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ASC 회원들 가운데 어느 정도나 여전히 그럴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마거릿 미드와 그녀의 사이버네틱스 동료들이 단어 '되먹임'에 붙였던 뜻과 함의들이야 기껏해야 막연한 것들임에도, 그밖에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단어를 습관적으로 써왔다. 그리고 용어 '실제 목적을 지닌 메커니즘'과 관련해서, 나는 사이버네틱스 창발 이전 <아리스토텔레스 같이 옛것을 고집하는 자들만이 정규 (즉 엄밀한 의미를 갖는) 과학은 실제하는 목적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어야 하는 것으로 믿었던> 목적론에 대한 견해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이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그후 30년에 걸쳐 배웠던 것들 몇몇을 간략히 펼쳐보이는 것이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전류나 전압 증폭기에서, 또는 교사가 학생한테 '너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의미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진 종류인 양의 되먹임은 아주 느슨할 정도로만 실제하는 목적과 연결된다; 그러나 음의 되먹임은 그것과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여기서 논하고 싶다. 노버트 위너는 그것을 <1940년대에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정상으로 간주되었던, 흡연자가 그의 담배를 뽑아드는, 활동으로>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리의 동작을 조절 또는 규제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 동작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크기의 양이다 (위너, 1961, p.97).

 

     이러한 기술에는 몇몇 묵언의 함의들이 있다. 어떤 행위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고 말하고자 할 경우, 혹자는 그 행위가 의미하는 것, 그 행위를 완전히 이행되도록 했던 그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는 목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아직까지 완수되지 않고 있는 목표는 그 행위를 자신한테 맞게 끌어당기고 있다고 혹자가 믿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러한 뜻이 바로 역사적 의미에서 '목적론'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의 종말로 이상 세계를 보았고, 그는 그것이 모든 발달을 이끌어내 궁극에서는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평범한 방식으로 목표를 지향했던 행동들을 무시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거기서 설명 원리들 가운데 네 번째 것을 보았고, 그것을 '목적인'이라 칭했고, 설명하기를:

 

… 일은 무엇을 위해 행해진다; 이를테면, 건강은 산책하는 이유다. ('그는 왜 산책하는가?'에, '건강을 위해'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리 말하며 우리는 우리가 그 까닭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 Physics, Book II, ch3, 194b)

 

     아리스토텔레스는 몇 가지 다른 예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의 인과성에 대한 개념 분석을 읽을 혜택을 그가 누렸다면 분명 지녔을 필수적인 연결 하나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가 마음에 명백히 품었던 것은 이것이다: 경험은, 걷기가 관절을 단단하게 하고 지방을 줄이고 혈액순환을 빠르게 하고 심장을 자극하고 등등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걷기는 그 자신이 유익한 것임을 대체로 보여주었다. 달리 말해, 오늘날로 말하면 조깅이랄 수 있는, 걷기는 건강에 '효과적인' 원인으로 입증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체 상태를 개선하려 걷거나 천천히 달린다: 목마를 때 물 마시고 너무 더우면 웃옷을 벗는 것처럼. 이와 관련해서, '현재에 가해지는 미래의 작용'이라는 가정만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신비도 없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경험에서 귀납적으로 그러모았던, 그리고 과거에 작동했던 방식은 한번 더 작동하리라 우리가 기대하는, 그 규칙들을 적용하는 일일 뿐이다 (글라저스펠트, 1990, 1998).

 

     이러한 원리는, 정말이지, 보편적이다. 우리가 창조하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렇게 갈망했던 항목을 경험이 "결과 또는 효과"로서 결부시켰던 적이 있는 특정 사건이나 행위를 찾는다. 우리가 그것을 찾으면, 우리는 그것의 인과적 기능을 구동시키려 한다: 이 기능이 우리가 원했던 것을 산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과학자들은, 이를 언제나 명시적으로 진술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직한 원인-결과 연계들을 확립시키려 그들이 가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음의 되먹임에 대한 위너의 예로 돌아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다른 두 가지 점이 있다. 착수된 행위가 '아직 완수되지 않았음'을 판단하는 양은 어떻게 측정되고 확립시킬 것인가? 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접근할, 가능하지 않은, 권리를 요청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역설은 그 원리를 정식으로 만들면서 저지른 작은 잘못으로 생긴 것이다. 그 편차는, 현재의 행위로 바라던 미래의 최종-상태를 기점으로 평가되거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행위들이 과거에 믿음직스럽게 산출했던 어떤 상태의 재현을 기준으로 평가되거나 측정되고 있다.

 

     초기 사이버네틱스 문헌들에서 즐겨 쓰던 예로, 나무랄 데 없는 구식 자동온도조절기는 아직도 쓸만한 설명 도구다. 거기서 어떤 온도가 사용자가 바라는 방 온도인 목표-상태로 설정된다. 그 자동온도조절기는 그 방에 있는 어떤 것도, 또는 바람직한 온도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 자동온도조절기는 설정된 기준치와 그것이 감각 기관에서 받아들인 되먹임, 즉 그것의 온도계가 가리키는 수치 사이에 있는 어떤 편차를 제거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감각된 수치가 너무 낮으면 그것은 가열기를 켜고, 너무 높으면 냉방 시스템을 켠다. 고든 파스크의 비범한 구별을 채택하자면: 사용자의 관점에서 그 자동온도조절기는 ~위한 목적<즉 바라는 온도를 유지하는 것>을 갖는 반면에, 그 장치에 내재한 목적은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또한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 사이버네틱스의 두 번째 凸점을 분명히 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다. 극도로 민감한 온도기를 갖는 자동온도조절기를 상상하자. 그것이 기준치 아래의 아주 미미한 온도를 감지하면 가열기를 켠다. 온도가 기준 위로 오르는 순간 냉방기를 켠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그칠 줄 모르는 진동 상태로 진입한다. 이는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장치가 기준치 근방에서 오르든 내리든 촉발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無爲) 영역을 갖도록 그 장치를 디자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달리 말해, 단 하나의 전환점을 갖는다고 하기 보다는, 사이에서 평형을 잡기 위한 어떤 공간을 확보는 두 점이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아마도 현상 일반에 대한 사이버네틱스를 사용한 분석의, 특히 2차 사이버네틱스의, 가장 귀중한 凸점을 도해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유일한 또는 각각의 원인과 결과 같은 것들에 입각하지 않고, 그 보다는 제한들 사이에 놓이는 평형들에 입각해서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널리 만연한 환상, 우리는 우리 경험을 야기시키고 있다고 가정된 실재와 관련된 '정보'를 그러모을 수 있다는 기만에 찬 망상을, 피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알게 되는 경험  세계에서 어떻게든 경영 또는 관리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참고 문헌

 

Glasersfeld, E.von (1990) Teleology and the concepts of causation, Philosophica, 46 (2), 17-43.

Glasersfeld, E.von (1998) Anticipation in the constructivist theory of cognition. in D.M.Dubois (Ed.)
      Computing anticipatory systems(38-47), Woodbury, NY: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Mead, M. (1968) Cybernetics of cybernetics. In H.von Foerster, J.D.White, L.J.Peterson, & J.K.Russell (Eds.)          Purposivesystems, New York/Washington: Spartan Books.

Pask, G. (1969) The meaning of cybernetics in the behavioural sciences (The cybernetics of behaviour and
      cognition; extending the meaning of "goal"). In J.Rose (Ed.) Progress of cybernetics (pp. 15-44),
      London/New York: Gordon & Breach.

Wiener, N. (1961) Cybernetics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 Cambridge,
       MA: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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